2012.03.03 12:58
박영만
법률사무소 의연대표
변호사, 산업의학전문의
1. 직업병과 작업관련성질환
직업병(Occupational disease)이란 직업에 관련된 유해인자가 그 질병발생에 있어 유일하거나 가장 중요한 원인인 질병을 말한다. 즉 작업환경에서 유해인자에 노출된 근로자에게만 발생하는 질병이다. 과거에는 진폐증이나 소음성 난청과 같이 명백하게 작업관련성이 인정되는 질병만이 산재요양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업무상 질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러한 직업병뿐만 아니라 직업외적인 요인인 생활습관이나 유전적 요인이 작업환경 요인과 함께 작용하여 질병이 발생하거나 악화되는 경우도 업무상질병으로 보고 있다.
작업관련성질환(Work-related disease)이란 직업적 유해인자가 발병의 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직업과 관련이 없는 개인적 특성, 생활환경, 사회적 요인 등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 질병을 말한다. 작업관련성질환에서는 직업적 유해인자가 비직업적 요인과 함께 작용하여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고 또한 질병 발생을 앞당기거나 악화시킬 수도 있다. 즉 업무적인 요인과 업무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하는 질병이 작업관련성질환이다. 이미 1985년에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산업보건전문위원회에서는 중요한 작업관련성질환으로 고혈압, 허혈성심장질환, 만성호흡기질환, 근골격계질환, 업무스트레스로 인한 행동변화(Behavioral response)와 정신신체질환(Psychosomatic disease) 등을 들고 이의 예방을 강조하였다. 최근 우리나라의 업무상질병 통계에서도 작업관련성질환이 전체 업무상질병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1996년에는 진폐증이나 소음성난청과 같은 전통적인 직업병이 전체의 61%를 차지했는데 2003년에는 작업관련성질환인 뇌심혈관질환 비중이 65%를 차지했다
2. 과로사와 돌연사
돌연사란 건강하던 사람 또는 대수롭지 않은 증상을 가진 사람이 갑자기 사망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신체이상 증상이 나타난 24시간 이내에 예기치 못하게 급사하는 경우를 돌연사로 보고 있다. 대부분의 돌연사례에는 기존질환이 있으며 여기에 유발요인(유인)이 작용하여 기존질환을 급격히 악화시켜 예기치 못한 사망을 일으킨다. 돌연사의 기존질환으로는 심혈관계, 호흡기계, 중추신경계 질환 등이 있고 유발요인에는 과로, 목욕, 배변, 정신적 충격, 음주, 약물, 성행위, 외상 등이 있다. 유발요인은 정상인에게 아주 경미한 영향을 미치므로 안정을 하면 바로 회복되어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증과 같은 기존질환이 있는 사람은 유발요인이 심장에 과도한 부담을 주거나 혈압을 상승시키는 등 증상을 급격하게 악화시키는 방아쇠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에 뇌심혈관질환으로 사망할 수도 있다. 법의학자들 연구에 따르면 돌연사 사인은 뇌출혈과 심근경색 등 뇌심혈관계 질환이 60% 이상이고 유발요인으로는 과로가 20%~40% 정도로 가장 많았다고 한다(문국진의 1983년 논문, 곽정식의 1992년 논문).
과로사는 돌연사와는 다른 개념으로 과로가 유발요인이 되어 심장이나 뇌 등 중요 장기 기능이 급격히 악화되어 죽는 것을 의미한다. 1969년 일본에서 29세의 신문배급소 사원이 과로에 시달리던 중 뇌졸중으로 갑자기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에서 뇌심혈관질환이 최초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게 된 후 일본에서는 1970년대 불황시대에 스트레스와 과로에 시달리던 근로자들이 사망하는 사례가 많아졌다. ‘과로사’란 용어는 1978년에 우에하타가 처음으로 ‘장시간의 과중한 노동으로 인한 사망’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이후 과로사로 가장을 잃은 가족들이 산재인정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을 하면서 과로사는 사회적 관심사가 되었다. 의학적으로 정의하자면 과로사란 과중한 업무로 고혈압, 동맥경화증 등 기존질환이 악화되어 뇌혈관계나 심장 등에 회복 불가능한 병적 상태가 발생하여 사망한 것을 말한다.
과로사는 어떤 증상이 시작되어 사망하기까지의 시간을 따지지 아니하는데 비해 돌연사는 그 원인이 무엇이든 증상이 나타난 후 짧은 시간 안에 사망하는 것을 의미하는 점에 차이가 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는 과로사가 돌연사 모습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급사나 돌연사를 과로사와 혼동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또 돌연사의 유발요인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과로여서 과로사라고 하면 모두 돌연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과로사는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이나 정신적인 긴장이 심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야근을 많이 하는 사람, 교대근무를 하는 사람에게 주로 발생한다. 대부분의 과로사한 근로자가 기존에 뇌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사망의 직접원인도 이러한 뇌심혈관계 이상이므로 뇌심혈관질환으로 인한 과로사는 가장 중요한 작업관련성 질환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과로사를 반드시 뇌심혈관질환에 의한 것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3. 과로와 스트레스
가. 업무스트레스(Work-related stress)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극을 받더라도 어느 정도 일정한 내적 상태(항상성)를 유지해야 한다. 스트레스란 생명체의 항상성을 뒤흔들고 생존을 위협하는 내외의 자극에 생명체가 그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나타내는 심리적․신체적 긴장상태에서의 반응을 말한다. 스트레스는 원래 ‘물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물리학용어인데, 생물학 분야에서는 1944년 캐나다의 한스 셀리에(Hans Selye)이래 ‘개체에 부담을 주는 육체적·정신적 자극(스트레스 자극)’이나, 이러한 ‘자극에 생체가 나타내는 반응(스트레스 반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스트레스 자극의 종류로는 크게 신체적 스트레스(더위, 추위, 소음, 힘든 작업, 야간작업 등)와 심리적 스트레스(가정과 사회 업무와 대인관계로부터 생기는 갈등, 좌절, 불안 등)가 있다. 이러한 신체적 스트레스와 심리적 스트레스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체 스트레스 반응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한편 업무스트레스(업무스트레스반응)란 ‘근로자가 자신의 지식과 능력을 넘어서는 업무상 요구사항과 중압감에 더 이상 적응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반응’을 의미한다.
피로(Fatigue)란 계속된 운동이나 작업 등으로 심신기능이 지치고 저하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피로는 스트레스 자극에 대한 생체의 방어반응으로도 볼 수 있는데 나른함, 식욕부진 등이 나타나고 휴식을 취하면 대부분 회복된다. 또한 일에서 성취동기가 부족하거나 업무에 몰두할 수 없을 때도 쉽게 피로해질 수 있는데 이것은 피로에도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양자는 질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피로를 하나의 측면에서만 판단하기는 힘들다. 과로(Overexertion)란 일반적으로는 ‘장시간의 과중한 노동’이라는 의미로도 쓰이나 여기에서는 피로가 회복되기 전에 다시 피로가 겹쳐지고 이것이 반복되어 ‘피로가 축적된 상태’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과로는 그 자체를 질병(심신의 전체 또는 일부기관이 장애를 일으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고 통증이나 허약증상이 나타나거나 나타날 것 같은 상태)으로 볼 수도 있고 또한 다른 질병을 초래하는 요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서양문화권에는 과로사에 해당하는 적당한 개념이 없다고 한다. 과로사는 개인보다는 조직이나 집단을 우선시하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특이한 현상으로 주로 동양권에서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서양에서는 좀 더 광범위한 업무스트레스라는 개념으로 업무상 부담이 근로자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과로는 ‘장시간 노동이라는 육체적 활동’에 비중을 더 두는데 비해 업무스트레스는 작업 자체뿐만 아니라 대인관계나 조직문화 영향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로 쓰인다.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업무스트레스의 위험요소로 작업 성질, 작업량과 속도, 작업시간, 작업환경의 유해요인, 작업 자율성, 고용 안정성과 보수, 업무상 지위와 역할, 업무상 대인관계, 조직문화, 가정과 직장생활의 균형 정도를 들고 있다. 또한 업무스트레스가 신경정신적인 증상뿐만 아니라 고혈압과 심장병을 일으키고 음주와 흡연량을 증가시키며 면역기능을 떨어뜨려 병원균에 쉽게 감염된다고 발표했다(Work organization & Stress. WHO 2004).
과로사는 극단적인 업무스트레스반응으로 볼 수 있다. ‘장시간의 과중한 노동’이라는 스트레스 자극과 이로 인한 ‘피로 축적’은 업무스트레스의 한 부분이고 여기에 더 이상 신체가 적응하지 못하고 급격하게 무너지는 상황이 과로사이기 때문이다.
나. 스트레스 영향
스트레스는 대뇌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이에 대응해 우리 몸은 신체 대사를 높이는 부신피질호르몬과 자극 호르몬인 아드레날린을 분비한다. 이 호르몬들은 인체가 위험에 대처해 싸우거나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힘과 에너지를 제공하여 우리 몸을 보호한다. 스트레스 자극을 받으면 인체는 맥박과 혈압,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이 긴장하여 위기에 대응하며 혈중의 당·지방·콜레스테롤 양이 증가하여 자신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한다.
스트레스는 직접 면역반응을 일으키기도 한다. 인체가 스트레스 자극을 받으면 병원균에 대항해 싸우는 백혈구 수와 백혈구 중 중성구의 비율이 증가한다. 하지만 일부 면역세포는 증식능력과 활동력이 감소한다. 또한 암세포를 제거하는 세포독성 T세포(cytotoxic T cell)와 자연세포독성세포(natural killer cell)의 활성도가 감소한다. 한편 여러 가지 염증물질이 증가하여 염증을 일으키고 체세포 돌연변이와 DNA 손상이 증가한다. 암의 발생과 관련이 있는 혈관형성인자(Angiogenic factor)와 활성산소(Reactive oxygen species)도 스트레스와 관련하여 반응을 보인다.
스트레스가 무조건 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치는 것이 아니다. 적당하면 오히려 신체와 정신에 활력을 준다고 한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스트레스 자극이 장기간 반복되면 사람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되고 교감신경이 계속 긴장하면서 정신적·신체적인 기능장애나 질병을 일으킨다. 스트레스는 특히 고혈압, 심장병, 위궤양 등의 직접적인 원인이고 신경증, 우울증 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무리한 신체작업으로 인한 과로 증상은 주로 사용한 근육과 관절에 근육통과 관절염 등이 나타나며 그 외에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두통, 불안, 불면, 혈압상승, 호흡곤란, 위장장애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과로는 힘든 일을 하거나 장시간 동안 강도 높은 작업을 하고도 적절하게 쉬거나 충분하게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그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 외에도 정신적인 부담이 큰 작업(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하여 항상 긴장해야 하는 작업, 같은 자세를 계속 유지하는 작업, 단조로운 작업), 물리적 화학적으로 유해한 작업환경 등이 과로 요인이다. 또한 야간작업이나 불규칙한 교대작업도 신체가 가진 고유의 리듬 즉, 낮에는 활동하고 밤에는 휴식하는 낮과 밤의 리듬을 해쳐 과로로 건강 장애를 일으킨다.
4. 과로사 요소
근로자가 과로사하기 전까지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신체는 균형을 유지하다가 어느 선을 넘게 되면 갑작스러운 죽음이 발생하게 된다. 겉으로는 건강하던 사람이 또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증상을 보이던 사람이 예기치 못하게 갑자기 사망하므로 사인과 유발요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과로사의 구성요소와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구별하면 과로사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과로사는 과로로 인한 기존질환의 급격한 악화이므로 먼저 ①기존질환이 있어야 한다. 기존질환은 유전적 요인이나 생활습관, 나이 등 순전히 개인 특성 때문에 발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본 것처럼 스트레스와 과로 때문에 발생하는 작업관련성 질환이 될 수도 있다. 또한 과로는 기존질환을 악화시킨다.
다음으로 과로사의 유발요인인 ②과로가 있어야 한다. 과로는 업무량이나 업무긴장도가 갑자기 증가하거나 작업시간 변화로 신체리듬이 파괴된 경우에 주로 문제 삼는다. 그러나 장기간의 단순한 반복 작업이라도 그 업무 특성상 인체에 지속적인 스트레스 자극을 주어 서서히 피로가 축적된다면 과로사의 유발요인인 과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과로는 과로사의 유발요인이기도 하지만 기존질환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그 외에 과로 정도에 영향을 미치는 ③위험요소로 앞에서 본 작업환경의 유해요인 등 업무스트레스 위험요소를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위험요소는 기존질환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즉 기존질환과 과로 그리고 업무상의 위험요소는 순차로 또는 동시에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과로사 발생에 관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