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말 여성주의 저널 일다 기고문


“아, 시원하네요. 제가 원래 가슴에 담아두는 편인데, 오늘은 실컷 얘기를 했어요.”

 

백화점의 화장품 판매원으로 일하는 30대 초반의 한 여성이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면서 잘 있으라는 얘기와 함께 혼잣말하듯 한 말이다. 한 명 당 2시간. 짧지 않은 인터뷰 시간동안 내게는 그들의 고통이 고스란히 옮아온 것 같다. 우울하다. 이런, 마지막 질문을 빼먹었구나.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이 앞으로 유통서비스 분야의 여성노동자 건강을 지키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의자를 놓으면 좋겠네요, 서비스 노동자를 존중하는 날 캠페인을 해서 사회의 의식을 바꾸면 좋겠어요, 화장실? 눈치보지 않고 화장실 가는 것이 좋아요... 처음엔 제각각의 얘기들이었지만, 그들이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에게 바라는 것은 몇 가지로 압축되고 있었다.

 

“그래요. 내년부터는 꼭 그런 일을 해볼게요. 조합원들도 관심 많이 가져주시고 함께 해주세요. 내년에는 백화점에 의자를 한 번 놓아보자구요.”

 

지난 1년간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 건강의 문제를 조사하고, 민주노총과 서비스연맹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방안을 만드는 일을 해왔다. 유통서비스 분야는 처음 접했다. 하지만 나는 10년 가까이 한 가지 주제를 상대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 동안 상대해온 숙제를 넘어서고 싶다. 이 글은 참으로 한심한 연구활동가의 자기고백이다.

2000년, 미용노동자들이 찾아오다
 
2000년에 우리나라 미용노동자들의 건강문제에 대해 조사할 기회가 있었다. 평등노조에서 미용지부가 만들어지면서 우연찮게 인연이 닿았다. 처음 하는 조사다보니 다른 나라의 상황을 많이 찾아보게 되었다. 북유럽의 자료가 많이 참고 되었는데, 그곳 미용노동자들은 대략 근무시간이 주당 32시간 정도 되고, 하루에 상대하는 손님이 평균 5명 정도 되고 있었다. 정부(노동부)의 감독이 미용실에도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정부의 지도에 따라 각종 보호구나 환기시설 등이 개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용노동자들 중에서 직업성 질병에 의해 미용노동을 그만두는 경우가 자주 보고되고 있어 관리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었다. 핀란드에서는 전체 미용노동자의 약 10 % 정도가 천식을 앓고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우리나라의 미용노동자들에게 얼마나 일하는지 확인해보았더니, 하루 12시간씩 일주일 6일을 근무하고 있었다. 주당 총 72시간 정도는 노동을 하고 있었다. 노동부의 근로감독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며, 환기시설이 있으면 좋지만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천식을 일으키는 블리치 파우더 먼지를 마시는 건 예사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미용사들의 천식이 20 %, 30 %에 이를까? 조사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그런 결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른바 건강한 노동자 효과(healthy worker effect)라는 것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미용학원에 다니거나 미용노동자로 첫발을 내딛는 초기에 피부질환이나 호흡기질환으로 탈락하는 숫자가 핀란드보다 훨씬 클 것이며, 고되고 유해한 미용노동을 견뎌낼 수 있는 몸을 가진 건강한 노동자들만 살아남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 조사해봐야 탈락한 사람들의 규모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것처럼 결론이 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근골격계질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핀란드에 비해 우리나라의 미용노동은 알러지에 강하고 튼튼한 무릎과 허리를 가진 노동자들에게만 열려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만드는 미용노동은 매혹적 직업이다. 미적 감각이나 자질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알러지 때문에 미용노동에 종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너무도 잔인한 일이다. 이렇게 심각한 진입장벽과 인권침해가 있을까?

천식환자를 찾아내어 사회적으로 대책을 요구해야겠다고 생각하였으나, 노동조합은 아직 이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고민과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사는 하였으되, 그 결과는 발표하지 않았다. 속상했다. 조금만 기다리면 노동조합과 함께 이 심각한 문제를 사회에 알리고 대응할 수 있겠거니 했는데, 곧 10년이 된다. 

 

2003년, 학습지 교사노동자들이 찾아오다
 
학습지 노동자들에 대한 조사는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에 대한 논란이 한창인 2003년에 진행되었다. 당시 학습지 시장에 비해 학습지 회사가 너무 많이 생겨서 과다경쟁이 발생하였고, 그 경쟁의 최선두에 교사노동자들이 배치되었다. 교사노동자들이 영업을 뛰고 실적의 압박을 느끼다보니 자기 돈으로 회비를 물면서까지 회원을 늘려서 보고하는 일도 발생했다. 그들은 밥 먹는 시간이 불규칙적이어서 위장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한 집을 끝내면 또 다른 집으로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넘어져 다치는 일도 흔했다. 으슥한 골목을 무서워 떨며 돌아다니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며, 학생을 기다리다가 학부모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유산은 왜 그리도 많은지...

 

당시 정부측 연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니만큼 산재보험을 적용하여 교사노동자들을 보호할 필요가 크다는 고마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들이 겪는 건강과 안전의 문제는 산재보험이 없어서 발생된 것이 아니었다. 복도에 걸린 회원관리 실적판을 떼어내지 못하는 힘없는 노동자이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들이었다. 노동자성이 부정당하면서 그나마 있던 노동조합의 활동이 위축되고 회사로부터 무시당하면서, 집단적으로 부당함에 대항할 힘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발생된 문제였다. 그들의 건강문제는 총체적 결과에 불과했다. 스트레스에 시달릴대로 시달려 우울증 걸린 다음에 산재보험으로 우울증약을 먹게 되는 것으로 노동자들이 고마워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조사보고서에 노동자성 인정이야말로 학습지 교사노동자들의 건강을 보호할 유일한 길임을 결론으로 제시하였다. 노동자 건강을 연구하는 나에게 특수고용직 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은 선언이 아니라 유일한 대안이었다. 다행히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와 학습지노동조합과 함께 조촐한 보고회를 가졌다. 노동자성 인정을 위해 다함께 투쟁하자고 술잔을 부딪쳤다. 그런데 2007년 10월, 학습지노동자들에 대해 산재보험을 적용하는 것으로 법이 개정되었다. 보험료 전액을 사업주가 납부하는 일반 노동자와는 다르게, 반은 노동자 반은 사업주가 내는 방식이란다. 여전히 그들이 겪을 안전보건의 위험들은 감소하지 않은 채, 편법적인 산재보험 적용만 이루어졌다.
 
2007, 유통서비스 노동자들을 찾아가다

 

미용노동자와 학습지노동자를 경험한 이후, ‘어디에 무슨 일이 있다더라’ 조사해서 발표하는 것으로 노동자의 노동조건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다른 나라의 노동운동이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찾아보게 되었고, 느낀 바가 컸다. 국제노동기구에서는 오래전부터 괜찮은 일자리란 안전한 일자리라는 개념을 형성하였고,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이 주어지지 않으면 안전도 일자리의 질도 보장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었다. 전세계적으로 “조직하라(Organize)!!!"는 것이 안전보건의 구호였다. 미조직 영세사업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이 없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내몰리는 것을 지적한 슬로건이었다. 영국의 수퍼마켓에 서비스산별노조 안전보건대표자의 사진과 연락처가 적힌 포스터가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내 가슴속에 꽈악 막혀있던 그 무엇인가를 정통으로 때린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 우리나라 미조직, 영세,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 해결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아직 이랜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본격화되기 전인 2006년 말, 나는 유통서비스여성노동자들의 건강문제를 2007년의 중요 과제로 선정하였다.

 

물론, 주변의 상황이 좋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2006년 민주노총은 노동안전보건위원회라는 것을 만들어서 노동자 건강의 문

제를 민주노총의 중요한 의제로 만드는 작업에 들어갔다. 나는 전문가에 배당된 위촉직 위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2006년 한 해 동안 노동안전보건위원회 회의를 하다 보니, 금속노조, 화섬연맹, 공공연맹, 보건의료노조, 건설연맹은 회의에 참석하지만 비정규 노동자들이나 여성서비스노동자들이나 영세노동자들을 대표하는 조직에서는 안전보건 담당자도 없어서 회의에 참석을 못하는 수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는 조직들을 만나러 다녔다. 이 조직들에서는 의아해하는 나에게 ‘노동자 건강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담당할 만한 사람과 여력이 없어서 힘들다’는 얘기들을 들려주었다. 노동조합들의 발상 전환도 필요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노동자 건강관련 활동을 전개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을 인정해야했다.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에서 이러한 현실을 놓고 의논을 했고, 일단 서비스연맹을 중심으로 유통서비스여성노동자의 문제부터 제대로 된 대응을 해서 전 조직적으로 미조직, 비정규, 영세,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조직들이 자기 조합원을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방향을 분명히 하였다. 조사의 제목은 “유통서비스 노동자의 안전보건 의제개발”이다. 2007년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과 관련한 조사는 ‘실태조사’가 아니라 ‘의제개발’을 위한 조사였다. 상황이 어떤지 보고 끝내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우리가 무엇을 해야만 상황이 바뀌겠느냐 하는 실천적 측면을 강조한 조사였다.

어느 정도 조사가 진행되었을 때, 서비스 연맹에게 산하조직의 대표자들에게 보고회를 하고 싶다고 요구했다. 서비스연맹에서는 세미나 자리를 한 번 마련하였고, 반응이 좋았다. 서비스연맹은 다시 임시대의원대회에서 발표할 시간을 내게 주었다. 전형적인 유통서비스 분야의 대의원들 뿐 아니라 피자헛, 한진관광 등 다양한 분야의 서비스 노동자들이 조사결과에 동의해주었다. 이제 서비스연맹은 유통서비스 분야의 여성노동자가 겪는 우울증, 피곤함, 하지정맥류, 무릎과 다리의 골병, 인격적 모독, 각종 스트레스, 남편과 아이가 아파도 출근해야 하는 문제, 다리가 부러져도 깁스를 풀고 일해야 하는 문제에 대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008년 1월이 기다려진다

 

며칠 전 서비스연맹과 회의를 했다. 서비스연맹에서는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활동을 08년 사업으로 이미 배치를 해놓은 상태이다. 나는 그동안 서비스연맹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연구자들을 더 조직했다. 사회학자, 산업의학 의사, 법률전문가 그리고 인간공학 전문가. 전문가들도 가급적 여성을 조직하였다. 그 이유는 여성과 남성이 위험을 느끼는 감수성이 다르다는 내 생각 때문이다. 여성이 많은 병원 사업장 같은 곳에서 조사를 해보면 폭력의 위험에 대해 남성보다 여성이 2배는 높게 문제인식을 하고 있다. 폭력 뿐 아니라 부딪치거나 끼여서 발생하는 사고조차 여성이 더 높게 인식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다루는 만큼, 여성연구자들이 결합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다행히 인간공학 전문가를 빼고는 모두 여성연구자가 위촉되었다.

서비스연맹과 연구자들은 1월 초에 첫 번째 회의를 갖기로 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08년 서비스연맹의 건강권 핵심의제를 결정하게 될 것이고, 어떻게 사회적으로 알려나가며, 실천프로그램을 어떻게 기획할 것인지 의논하게 될 것이다. 백화점과 대형할인마트에 의자를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복도 곳곳에 식수를 설치하라고 할 수도 있고, 산업안전보건법에 화장실 기준을 마련하라고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이제부터 우리의 노동조건을 바꾸기 위해 논의를 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며 인권 침해를 당하는 당사자로서 유통서비스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이야기하게 될 것이며, 주눅 든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드디어 꿈을 꾸게 되었다.

 

번호 제목 날짜
139 컴퓨터 작업자 목·어깨 통증 스트레칭만으론 해결 못해 2012.03.04
138 악몽보다 무서운 수면 무호흡증 2012.03.04
137 전문가들 “사망-직무 연관성 자세히 밝혀야” 2012.03.04
136 고객에 뺨맞는 직원 사장님이 지켜주세요 2012.03.04
135 휴대폰 기업들, 노동자 건강엔 ‘불통’ 2012.03.04
134 흔한 피부질환, 더 신경써야 2012.03.04
133 숱한 ‘병원 폭력’ 아시나요 2012.03.03
132 CCTV에 갇힌 노동자 2012.03.03
131 CCTV에 갇힌 노동자 2012.03.03
130 노동자에게 진정한 추석 선물은… 2012.03.03
129 말 많은 직업의 ‘소리없는 장애’ 2012.03.03
128 ‘직장 왕따’ 느는데 규제는 없어 2012.03.03
127 근골격계 질환, 국가가 ‘처방’해야 2012.03.03
126 ‘꾀병’ 취급받는 편두통의 공포 2012.03.03
125 용접사의 책임으로 끝내려는가? file 2012.03.03
124 여전히 낮은 기업체 안전보건 의식 속에 진행되는 여수․광양 역학조사 [1] file 2012.03.03
123 과거 현재 미래가 얽힌 석면 문제 다시 보기 file 2012.03.03
122 허용기준, 무엇을 허용하고 있는가? [1] 2012.03.03
121 작업환경측정제도 어떻게 바뀌는가 file 2012.03.03
120 화학물질의 위험은 어떻게 이전되는가? [3] 2012.03.03
119 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주세요 2012.03.03
118 백화점 노동자들에게 의자를 2012.03.03
» 스스로 자신의 건강을 주장하는 것이 답이다. 2012.03.03
116 노동과정 변화는 근골격계질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file 2012.03.03
115 노동강도 측정과 근골격계질환 2012.03.03
114 진정한 근골 유해요인조사는 노동조건이 변화하는 ‘작업개선’ 이뤄지는 것 file 2012.03.03
113 근골 사업! 최소한 이것만은 실천하자 [1] 2012.03.03
112 근골격계 부담작업 유해요인조사의 사각지대, 중소영세사업장 2012.03.03
111 2007년 근골격계질환 유해요인조사 무엇을 남겼나? file 2012.03.03
110 '올림픽 상품'의 노동착취 대회 2012.03.03
Name
E-mail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