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권리, 사치인가? 상식인가?

2012.03.04 14:42

조회 수:7100

이 글은 월간 전국금속노동조합 9월호에 실린 글임을 밝혀둡니다. 제목 일부를 일과건강 편집에 맞게 수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기사 내용과 사진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좁은 공간·탁한 공기에서 벽에 기댄 채 잠깐 쉬기


광화문에는 큰 서점이 있다. 지하 공간이라 오래 머무르면 머리가 아파오는데 그래도 그 서점에 가끔 가는 이유는 문구류 구경을 덤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지난 주에는 문구를 판매하는 노동자를 만나러 그 곳에 가게 되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하루 종일 서서 문구를 판매하는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조사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빽빽한 문구 진열대 사이를 함께 움직이면서 점검하기란 꽤 고역이었다. 노동자들은 자기들끼리 부딪히고 손님과 부딪히면서 물건을 진열하고 고객을 응대하고 있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는 노동자나 고객이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나마 공간이 확보 된 계산대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없어 손님이 없을 때에도 벽에 등을 기댄 채 서서 잠깐 쉬는 정도였다.


지하 주차장·청소 도구함에서 쉬는 노동자


휴게실을 보여 달라하니 숨이 턱턱 막히는 지하 주차장 커피자판기 옆으로 안내했다. 의자가 없어서 그냥 서서 음료수를 먹으며 쉰다고 했다. 임산부가 4명 정도 있었는데 그 여성노동자들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건물 밖 멀리 떨어져 있는 물류 창고에 탈의실과 휴게실이 있긴 하지만 왔다 갔다 하는데 15분 이상이 걸려 식사 시간말고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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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소용역 여성노동자의 휴게 공간 ⓒ 세종대 사진 집단 포뮨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된 유통서비스 분야의 다른 사업장도 형편이 비슷하다. 중장년 여성노동자들이 주로 하는 청소 업무는 대부분 간접 고용 비정규직이다. ‘청소도구함’이나 ‘박스 한 장’이 이들의 휴식 공간과 탈의 공간이다. 조금 조건이 나은 곳이 원청에 요구하여 확보한 ‘계단 밑 공간’ 정도다.


지난해, ‘서서 일하는 서비스 여성노동자에게 의자를’ 캠페인이 진행되면서 법·제도에서 배제되고 통계에서조차 은폐되어 왔던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캠페인단이 화두로 삼았던 ‘의자’는 서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건강을 지킬 수 있는 도구이면서, 여성노동자가 ‘주로’ 제공하는 서비스 노동 가치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도구였다. 또한, 사후처리보다 예방이, 감수성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의자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쉴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휴게 시간’과 ‘휴게 공간’ 확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화학 쪽이라 위험한데, 비정규직 이직률이 높아서 안전교육이 비효과적이에요.” 

“아파도 그냥 다 나오고… 그렇게 다쳐도 나와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사실 눈치가 보이거든요.”

“산재로 쉬어야 되면 그냥 퇴사하는 거고…”


ILO 최장 노동시간 국가, 대한민국


여성노동자의 건강권 문제가 주목받기 시작했지만 위의 예처럼 비정규 여성노동자들이 겪는 고용불안 문제는 허술한 노동안전교육이나 부재, 산재 적용에 매우 취약한 상황들을 덮어버린다. 따라서 비정규 여성노동자들 스스로도 저임금이나 고용불안 문제에 비하면 건강문제는 사치라고 이야기하곤 한다. 그러나 연간 노동시간이 2316시간으로 ILO 가입 국가(평균 1768시간) 중 최장 시간 노동을 하는 현실에서 적절한 ‘휴게 시간’(근로기준법 제54조)과 ‘휴게 공간’(산업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276조) 확보가 사치인지 상식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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