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3 16:04
원진교육센터 연구원 한인임(uldam@dreamwiz.com), 일과건강 2007년 5월호
지난 4월 17일 50명 남짓 수용할 수 있는 회의실에 약 200명이 모여 ‘철도·지하철 안전과 공공성 강화를 위한 시민사회노동 네트워크 창립대회 및 철도안전법 개정안 공청회’가 이루어졌다. ‘철도·지하철 안전과 공공성 강화를 위한 시민사회노동 네트워크’는 이미 일과노동 3월호에서 자세히 소개되었으므로 추가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이 네트워크가 창립하면서 굳이 ‘철도안전법 개정안 공청회’를 한 이유에 대해 소개하고 짚어보고자 한다. 아마 독자들은 ‘철도안전법이라는 게 우리나라에 있기는 있는 건가?’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별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철도안전법은 2004년 10월에 재정되고 2005년부터 시행되었는데 2006년 7월1일부터는 ‘기관사 면허제’가 시행되었다.
일본은 1958년에 철도안전법이 만들어졌고 영국은 기존에 있던 1974년의 건강안전법과 철도법(Railway Act 1993)과 철도안전규정(Railway Safety Case 1994)에 의해 철도안전법을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역시 늦지만 이런 법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규제완화’가 미친 듯이 진행되는 현 시기에 일단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데 문제는 안에 꼭꼭 숨어있었다. 이 철도안전법에는 정부의 면피를 위한 술수와 노조파업 무력화 전략이 함께 숨어 있다. 그리고 이 ‘성과’와 맞바꾸는 딜의 대상은 철도·지하철을 이용하는 승객과 노동자의 목숨이다.
정부의 면피란 2003년 생목숨 192명을 앗아가고 14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대구지하철참사에 대한 즉각적인 대책 중 하나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는 ‘졸속’임을 반증해 줄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법이 만들어지면서 제대로 된 공청회도, 의견수렴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조파업 무력화 전략이란 무엇일까? 이는 ‘기관사 면허제’에 있다. 기관사 면허제는 아~무 내용도 없는 철도안전법의 ‘백미’이다. 이는 “철도공사 등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일정한 운전실무와 자격시험을 통하여 일정한 자격을 갖추면 기관사로서 기관차를 운행하던 것과 달리 현행 철도안전법은 철도차량을 운전하고자 하는 자는 건설교통부장관이 정하는 운전면허시험에 합격하고 일정한 운전실무수습을 수료하면 누구든지 철도차량을 운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 제도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교육훈련은 실승을 하는 게 아니라 시뮬레이터로 한다는 점이다. 간단한 운전면허 시험도 필기, 시험장, 주행시험을 거친다. 한량에 수십명씩 열댓량을 달고 다니는 기관차의 기관사가 한 번도 본선 궤도를 직접 타보지 않고 1천명 가까운 승객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얘기다.
둘째, 자동차 운전도 몇 개월 하지 않다가 갑자기 핸들을 잡으면 순서가 헛갈리는 때가 있다. 전동차, 기관차가 장난감도 아니고 다른 업무에 종사하다가 갑자기 기관사가 필요해졌다고 하면 ‘면허증’ 가진 사람은 누구나 기관차나 전동차를 몰 수 있게 된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셋째, 이 면허증을 따기 위해서는 수백만원의 교육훈련비와 수개월의 교육기간이 소요된다. 지금과 같은 고실업시대, 특히 청년실업의 수준은 두배, 세배에 이르는 시대에 기관사 면허증은 일반인에게 매우 달콤한 유혹이 되겠지만 실제로 이들이 모두 취업된다는 보장도 없다. 사회적 낭비가 되고 마는 것이다.
넷째, 결과적으로 해외에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다.
특히 두 번째 문제는 어딘가에서도 많이 들어본 듯한 얘기다. 발전 얘기다. 이건 산업자원부 작품이다. 건설교통부 작품 수준이다. 2006년 한국발전산업노동조합 파업당시 정부가 구상했던 ‘파업대체 필수인력’으로 약 600명 가량의 운전 및 정비를 할 수 있는 인력이 존재했다. 이름하여 발전상비군과 전사모(전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들은 발전소 노동자가 아니다. 물론 발전소 노동자였던 사람들도 있다. 이 두 조직은 모두 2002년 발전노동자들이 38일간의 파업투쟁을 끝낸 뒤 만들어진 조직이다. 전사모의 경우 산업자원부의 요구에 각 발전사별로 구성되었고 전부 퇴직자로 이루어져 있다. 발전상비군은 좀 더 심하다. 이들은 교육위탁기관으로부터 1년간의 교육을 받고 발전소에서 운전업무를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한 사람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일상적으로 발전소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지속적인 업무에서 열외 되었던 상태의 자격자들이다. 특히 1년간의 교육과정 이수를 통해 발전소에서 운전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역시 이들을 교육시킬 교육위탁기관도 발전소가 아니라 불특정 조직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발전소에 재직하고 있는 노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현장에서 일도 해본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파업으로 현장이 빌 경우 대체인력으로 활용되기 위해서이다. 파업이 일어났는데 생산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안전과 생명이 담보되지 않는 생산은 더욱 문제이다. 졸속적으로 육성되고 현장의 경험으로부터 오랜 기간 멀어져있는 사람들을 파업현장에 투입해서 정부는 무엇을 얻으려는 것인가? 발전소 현장에서는 이들이 교육훈련을 받기 위해 사업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물리력으로 막고 있는 상황이다. 이제 이러한 상황이 전국의 지하철에서, 철도에서 일어날 것이라 생각하니 무척 우울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끊어져도 건설업에서의 규제완화는 지속되고 있다. 지하철에서 수백명이 죽어나가도 ‘철도안전 위협법’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듯 후진적이고 저차원적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인가? 경제력 세계 10위면 뭘 하나. 강대국의 ‘나비효과’에 쩔쩔매는 수준의 경제력, 이따위 경제력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민중을 죽이는 정부, 우리는 이제 강력한 심판을 해야 한다.
이영순 의원실에서는 철도안전법 개정안을 의원발의한 상태이다. 졸속적이고 앙상하며 위협적인 현재의 법률을 바꾸자는 것이다. 개정안의 핵심은 이 지랄같은 법률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철도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공중·승객의 사상사고가 있었고 노동자들도 무수히 죽어나갔다. 이런 문제를 근본적으로 고치지 않고 ‘안전’을 운운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공중·승객의 사상사고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스크린 도어와 같은 설비를 도입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더욱 근본적이기 위해서는 자살자를 줄이기 위한 사회적 지지프로그램이 더 먼저 만들어져야겠지만. 안전을 직접 담당하는 노동자들의 안전보건 문제를 최우선 고려하는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안전책이다.
예컨대, 기관사가 사고로부터 자유로와져 공황장애나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부터 벗어나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안전인력을 확보하여 시설노동자가 죽지 않으면서 선로를 개량하여 안전운행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차량노동자가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지 않으면서 기관차, 열차, 화차, 전동차를 수리하여 선로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하는 것, 전기노동자들이 야간 근무에 내몰리지 않아 감전사고로부터 자유로와져 안정적인 신호체계 속에서 열차가 충돌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 역사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역무노동자들이 적절한 인력으로 진정한 서비스를 가능하게 할 수 있도록 하는, 진정한 철도안전법이어야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아주 늦어져서야 문제를 인식했다. 2004년 통과된 법률이 ‘음모적’으로 진행된 사실도 문제려니와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기관사 면허제’가 시행되기 시작하자 문제를 문제로 인식한 것도 역시 문제다. 늑장대응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이제라도 의원발의된 개정법안을 통과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쏟아져 내리는 개악 법률에 많이 지쳤겠지만 후퇴할 퇴로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현장을 최대한 조직하자. 그러지 않는다면 이 개정안이 얼마나 오랫동안 법안심사소위에도 오르지 못하고 갇혀있게 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