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팔 참사 30년을 다시 돌아보며

2014.11.27 14:12

조회 수:8552

보팔 참사 30년을 다시 돌아보며

글 : 양길승(일과건강 이사장)

보팔은 인도의 작은 도시 이름입니다. 1984년 12월 3일 한 밤중에 유니온 카바이드사의 농약공장에서 유독가스가 누출되어 당일 2000여명이 목숨을 잃고 20만 명이 피해를 당하여 세계에 참사의 도시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가난한 인도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보상이 지지부진하여 아직도 끝나지 않았고 그 금액도 보상이라 할 수 없는 낮은 수준이어서 세계인의 분노와 지탄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팔 현지에 세계 각지의 법률가, 노동운동가, 보건 안전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1992년 10월 민중재판소가 열렸습니다. 여기에서는 참사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고 그 뜻을 인도당국과 회사에 전달하였습니다. 이곳에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와 함께 제가 참석하였습니다. 일본 수은중독 규명으로 유명한 의사 하라다 마사스미 선생님과 제가 피해 주민을 진찰하고 그 가정을 찾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1960년대 한남동 해방촌 지역의 판자촌을 생생히 기억하는 제가 보아도 보팔 피해자의 삶은 말 그대로 벌거벗은 빈곤(적빈 赤貧)이어서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참사는 가난한 노동자와 빈민을 희생으로 삼아 그 뻔뻔한 모습을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보팔사고이미지.jpg해묵은 30년 전의 일을 다시 말하는 것은 30년 전의 참사에서 못 벗어나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입니다. 가스 누출은 2년 전 9월에도 구미에서 있었습니다. 10톤의 불산이 누출되어 3명이 돌아가셨고 주민들이 대피하고 노출된 땅을 중화시키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가스 누출사고가 있었지만 그때만 잠시 소란스럽다가 이내 잊혀지는 과정이 반복되었습니다. 안전 불감증이라 말하지만 진짜 의미는 참사 불감증이었지요. 그리고 올해 4월 세월호 참사를 맞았습니다. 불법(不法)과 비리(非理)가 근본 원인이 되어 발생한 비슷한 참사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이번에는 어린 학생들을 두 눈 빤히 뜨고 보는 앞에서 구조하지 못하는 무능(無能)을 보았습니다. 결국 온 국민이 맨붕 상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국가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린 정부와 안녕(安寧)할 수 없는 사회의 민낯을 보고 이제는 진정으로 우리 사회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자각과 각오를 키워온 2014년입니다.(1984년 인도 보팔 가스폭발 사고현장 출처: 전국교육신문)

우리는 노동재해와 직업병 문제에서 일찍이 같은 경험을 했었습니다. 안전과 보건을 위한 규정과 지침을 무시하고 생산성을 올린다는 미명으로 안전장치를 제거하고 작업을 시키면서 오로지 노동자에게 조심할 것만 강조하다가 사고가 나면, 노동자의 실수나 잘못으로 돌려 노동재해의 왕국이 되었던 노동현장을 바꾸기 위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88년 15살 문송면의 죽음,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은 노동자 건강과 안전에 대한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모든 노동조합이 노동안전과 보건 활동을 해왔습니다. 알 권리(유해물질과 사고위험에 대한 정보를 알 권리), 참여할 권리(안전과 보건에 대한 결정에 참여할 권리), 거부할 권리(위험이 뚜렷이 보이는 위험 작업을 거부할 권리)를 얻기 위한 노력이 현장에서 결실을 맺어 재해율은 3%에서 1% 밑으로 크게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3D(위험하고 더럽고 힘든) 작업이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에게 넘어가면서 공식 보고로는 재해율이 떨어졌겠지만 실제 재해와 직업병은 또다시 늘어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화학물질이 산업현장에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데 이에 대한 대응이 같이 가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환경과 여건이 전보다 좋아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보려고 노력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착각을 버리고 현실을 냉정히 보아야 합니다. 그 많은 참사를 통해서 바뀌지 않은 현실을 바꾸려면 우리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정규직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의 문제를 같이 보고, 자신과 자기 가족만이 아니라 이웃의 아픔도 함께하는 실천이 없으면 달라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서야 합니다. 그래야만 목소리 큰 사람만의 자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가 서있는 자리가 달라지고 우리 목소리가 달라졌을 때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권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는 모자랍니다. 그 권리를 못 가진 사람들과 함께 할 때 권리는 힘을 갖습니다. 참사가 계속되는 세상을 바꾸어 내려면 가진 것으로 착각했던 권리를 모두의 권리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일할 권리, 안전하게 살 권리를 보편적인 권리이고 그래야만 권리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보팔 참사 30년 만에 세월호 참사가 이어져 우리가 놓치고 짐짓 무시해왔던 우리의 책임과 노력을 다시 돌아봅니다. 그렇게 하여 이제 오늘 여기에서 참사를 끝내는 새로운 변화를 시작합시다. 신발 끈 고쳐 매고 소매를 걷고 바람 부는 광장으로 나아갑시다.

이 글은 아래의 매체에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 2천여명 사망한 인도보팔 참사 30년, 우리는 다릅니까?
[프레시안] 인류 최악의 산재 보팔 참사, 그리고 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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