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물품상자에 손잡이를 달아주세요 / 이윤근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소장

“상자에 손잡이를 달아주세요.”
무거운 물품 상자를 옮겨야 하는 마트 노동자들의 외침이다. “상자 손잡이가 뭐지?”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예를 들어보자. 여름철 무거운 수박을 샀는데 감싸 들 수 있는 망도 없이 그냥 들라 하면 들기 어렵다. 그러나 수박을 넣은 망을 손잡이 삼아 들면 한결 수월해진다. 무게는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만큼 물건을 들 때 적절한 손잡이는 매우 요긴하다.

상자에 손잡이 구멍이 없으면 상자 밑면에 손을 받쳐 감싸 들어야 한다. 만약 상자 옆면에 손잡이 구멍이 있다면 무게감은 수박처럼 훨씬 가벼워진다.

필자는 2019년 여름에 마트노동조합과 함께 대형마트의 노동환경 실태를 조사한 적이 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매장이 아니라 커튼 뒤편(후방, 창고) 쪽의 노동실태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국내 굴지의 대형마트를 돌아다니면서 총 5177명의 노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현장 평가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는 상상 외로 심각했다. 지난 1년 동안 손, 어깨, 허리 통증 등 근골격계질환으로 병원 치료를 받은 노동자가 69.3%나 됐다. 통증으로 인해 지난 1년간 1일 이상 회사에 출근하지 못한 사람도 23.2%에 달했다. 마트 노동자 대부분이 근골격계질환이라는 골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연히 대부분 직업병으로 추정된다.

통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반복적인 중량물 취급과 과도한 허리 숙이기, 팔을 가슴높이 이상 들어 올리는 부적절한 작업자세, 반복적인 동작, 장시간 서 있는 자세 등 매우 복합적이다. 이 중에서 가장 문제 되는 것은 중량물 취급이다. 주류나 음료 작업자는 평균 10.8㎏의 제품 상자를 1일 평균 252개 정도 취급하며, 상자를 드는 횟수는 1일 평균 403회나 된다. 어림잡아 계산해도 하루 4톤 이상의 중량물을 취급한다. 이는 허리에 가해지는 하중을 기준으로 기준치를 1.2배에서 최대 2.5배 초과하는 수준이다. 당연히 허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힘든 작업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이다. 소포장 방법으로 중량물의 무게를 줄이거나 전동식 카트를 사용하면 상당 부분 개선할 수 있다. 그러나 역시 돈이 들어가는 문제여서 쉽지는 않다. 적은 비용으로도 개선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다. 위에서 설명했던 상자에 손잡이 구멍을 뚫는 방법이다. 만약 손잡이 구멍을 뚫으면 과학적 계산으로 손잡이가 없을 때보다 허리 부담을 10% 정도 줄일 수 있다. 손잡이 부착뿐만 아니라 중량물을 드는 자세를 동시에 개선하면(상자를 들 때 몸의 중심에 최대한 가깝게 하고, 허리를 곧게 편 자세) 최대 40% 정도의 허리 부담을 줄일 수 있다.

마트 노동자들은 지난 1년 동안 고용노동부와 회사를 상대로 개선을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아직 개선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회사는 ‘단가가 인상된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구멍 하나 뚫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또 구멍을 내면 벌레 등 이물질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며 반대한다. 벌레는 구멍이 없어도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고, 만일 창고에 벌레가 있을 정도라면 구멍이 문제라기보다 기본적인 위생 관리의 문제로 봐야 한다.

연세대학교 원종욱 교수의 연구(2015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주요 근골격계질환으로 인한 사회적 손실 비용이 연간 4조449억원이 된다고 한다. 엄청난 비용이다. 만약 상자에 손잡이를 부착해서 근골격계질환자를 줄일 수 있다면 사회적 비용의 절감 효과 또한 엄청나게 커질 것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인 것인지 상자 손잡이 부착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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