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공장 큰 애기’의 비극 
부산 국제고무공업 대화재 (1960. 3. 2) 
 
나이 40 대 이상 대한민국 사람 중 왕자표 고무신 또는 프로스펙스 운동화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두 상품은 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재계 6위의 위세를 떨치던 국제그룹의 뿌리와 열매격 되는 상품들이다. 

국제그룹의 뿌리기업인 국제고무공업(대표 양태진)에서 1960년 3월 2일 오전 8시경 해방 이후 최악의 산업재해가 발생했다. 당시 부산 동구 범일동에 있었던 사업장에서는 군화를 만들고 있었다. 작업 중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 68명이 사망했고 29명이 부상을 당했다.  

불은 제 2공장 포화부 (고무풀칠 작업부서) 2층에서 시작되었다. 아침 7시 45분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포화부 2층에서 ‘퍽’하는 소리와 함께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불은 2공장 포화부에서 일하던 300명 정도의 노동자를 순식간에 덮쳤다. 불이 난 2공장에서 1공장으로 통하는 3개의 문이 있었는데 모두 신발 도난을 우려하여 굳게 잠겨져 있었다. 유일한 비상구는 1층으로 난 150cm 정도 폭의 좁은 계단 뿐이었다. 수 십 명의 노동자들이 이 곳으로 몰리자 나무로 된 2층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결국 가장 늦게 비상구로 달려온 50여명의 노동자들은 연기를 마신데다가 3m 높이에서 1층 바닥으로 떨어졌다. 1층에는 보일러와 고무롤러 등 인화 및 폭발성 기구와 물질로 가득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대피할 수가 없이 화마에 휩싸이고 말았다. 

더욱이 사망한 시신조차 신원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훼손된 경우가 많았다. 사고 직후 3월 3일까지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불과 20 여명 정도에 불과했다. 사실 정확한 사망자 수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사고 이후 행방불명된 노동자들이 있었는데 가족들은 회사측이 유골을 빼돌려 암장했다고 주장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었다. 독신인 직원들의 유골을 회사가 빼돌렸다는 풍설이 한동안 돌기도 했다. 

사고 발생 3일 뒤인 3월 5일 신원이 확인된 62명의 사망노동자들 합동장례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을 얼마나 서둘렀는지 미처 11구의 유해가 장례식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식을 시작하는 등 파행이 있었다. 

경찰은 이 사건을 노동자에 의한 실화로 종결하였다. 102번 여공 이필선(당시 26세)이 작업대 위에 있던 미제 딱성냥을 호기심에 그었고 옆에 있던 직공이 제지하자 연료통에 버린 것이 발화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이필선을 중실화혐으로 구속했고 그의 관리감독자 손용하와 문으로 달아나는 여공들을 막아 섰다는 또 다른 관리감독자 이창선 등을 업무상과실로 구속했다. 국제고무공업 대표에 대한 처벌은 없었다. 

사측이 3월 7일까지 주기로 한 위자료를 지급하지 않자 12일 유족 200여명이 이를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당시 이 사고에 관한 보도는 장례식 이후 몇 건의 보도가 있었을 뿐 3∙15 정∙부통령선거 이후에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이어서 곧 4∙19 혁명이 일어났고 희대의 대참사인 국제고무공업 화재와 그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역사의 격랑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이 사고의 원인은 과연 경찰 발표대로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된 신출내기 직원의 실수 때문이었을까? 신문 보도에는 사고 경위에 대한 목격자나 기타 관계자들의 인터뷰가 없다. 관할 경찰서인 동부산서는 직원 이필선에 대한 수사를 매우 비밀리에 진행했는데 언론은 이를 경찰의 피의자 신변보호를 위한 행위 정도로 추측하고 더 이상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경찰은 사고 직후인 3일 경남경찰국장은 내무장관이 현장을 순시할 때 이필선이 담배를 피우려고 성냥불을 켰다고 보고했다가 5일에는 장난 삼아 성냥불을 켰다고 발표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일한 지 4~5일 된 직원이 업무와 관계없이 오직 호기심으로 성냥불을 켰다는 점도 미심쩍다. 뿐만 아니라, 본드 칠을 하는 신발공장 안에 성냥이 과연 어떤 경위로 작업대 위에 있었는지도 매우 중요한데 그에 대한 언급도 없다.

당시 화재가 시작된 포화부에서 사용한 고무풀이라는 것은 대부분 ‘톨루엔’을 주성분으로 하는 고무용 접착제이다. 직원 1~2명 당 고무풀 하나를 사용했다고 하니 족히 200통은 제 2공장 안에 있었을 것이다. 추정컨대 작업장은 평상시 수백 피피엠의 톨루엔 증기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직원들이 퇴근하고 고무풀을 열어두기라도 한다면 작업장 바닥을 비롯하여 비교적 밀폐된 있는 곳은 충분히 국소적으로 폭발이 발생할 수도 있는 톨루엔 증기농도가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굳이 성냥불을 켤 필요도 없이 웬만한 정전기 스파크라면 폭발적 발화를 일으킬 수 있다. 3월 2일이면 창문은 닫혀 있어 공장내 유증기는 환기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정전기가 많이 발생하는 때이다. 사고의 원인은 톨루엔 증기에 대한 불충분한 환기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사고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급속한 화염을 일으켜 대피를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

워낙 피해규모가 큰 사고이므로 이 사고가 참사가 된 원인을 별도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고 대응과정에서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첫째, 300여 명이 일하는 공간에 이용 가능한 비상구가 단 개 뿐 이었다는 점이다. 불이 난 2공장에서 1공장으로 통하는 3의 철문이 있었는데 모두 신발 도난을 우려하여 잠겨 있었고 1층으로 연결되는 계단만이 유일한 탈출구였는데 이 또한 매우 비좁았다. 

둘째 2층 바닥과 1층으로 연결되는 계단이 나무로 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가장 늦게 비상계단으로 몰린 50 여명의 노동자들은 연기에 질식된 데다가 3m 정도 되는 아래층 바닥으로 일시 추락하면서 대피할 수 없을 정도로 다쳤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층에는 보일러와 롤러 등이 즐비하여 1층에서 불은 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셋째 화재발생 초기 조속히 비상대피를 유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어떤 관리감독자는 대피하는 직공들을 막아서면서 불을 끄라고 폭력을 가하기까지 했다고 하니 평소 관리상태가 어떠했을는지는 짐작이 간다. 당국은 몇 명의 말단 직원만을 형법상 ‘중실화’, ‘업무상과실’ 등으로 처벌하였다. 인화성물질이 많은 작업장에 성냥 등 화기를 금하고 톨루엔 유증기를 환기하거나 비상구 개폐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에 대한 처벌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근로자의 ‘안전과 보건’에 관한 사용자의 의무가 근로기준법(1953년 제정)에 일부 나와 있기는 했으나 법률만 제정되었을 뿐 하위 법령이 제정되지 않아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안전과 보건에 관한 하위 법령이 제정되고 집행관인 근로감독관이 배치된 것은 그 이듬해인 1961년의 일이다. 이 사건이 직접 원인이 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962년 5월 7일 근로기준법의 각령으로 사업장에서의 인화성물질 관리와 비상대피 등을 담은 근로안전규칙이 제정되었고 8월 8일 시행되었다.  

사건 뒤, 불에 탄 백 여명의 청춘과 그 유족들의 삶은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회사와 대표는 오히려 승승장구했다. 국제고무공업의 양태진 대표는 이 사고와 관련하여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불재벌’이란 일종의 별명을 얻는데 그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 대한 이러한 호칭은 ‘불 난 집 잘된다’는 속설을 증명하는 사례로 회자되었다. 가장 참혹한 일이 누구의 액땜처럼 취급된 것이다. 가수 남인수의 ‘한 많은 네 청춘(원제 사백환의 인생비극)’만이 숱한 ‘열일곱 열여덟 꽃 봉우리’들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주었을 뿐이다.  
 
열여덟 꽃봉오리 열아홉 꽃봉오리 눈물의 부산 처녀 고무공장 큰 애기야 하로(루)에 사백 환의 고달픈 품삯으로 행복하겐 못 살아도 부모봉양 극진트니 한 많은 네 청춘이 불꽃 속에 지단 말이냐 
새파란 그 순정을 수집(줍)은 그 순정을 그리운 님의 품에 하소연도 못하고서 새벽 별 바라보며 얼마나 울었드냐 남과 같이 못 배운 게 가슴속에 한이드니 피지도 못한 사랑 재가 되어 갔단 말이냐 
(사백환의 인생비극/ 남인수 노래/ 반야월 작사/ 나화랑 작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