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대변하지 않는 경제단체들
김신범 |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부소장
2016년 8월즈음의 일이다. 가습기살균제 참사에 대한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는 청문회를 개최했다. 청문회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특위 위원장이었던 우원식 의원은 청문회를 마무리하면서 기업의 대표들에게 국민을 상대로 말할 기회를 제공했다. 대형 마트의 부대표였던 증인 한 명이 발언하는데 하마터면 나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소비자와의 접점에 있는 기업이 신중한 처사를 하지 못하여 참사를 막지 못한 것을 사과하며, 그는 앞으로 안전을 확인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내겐 그야말로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전까지 나는 기업으로부터 자신들이 만드는 제품의 원료조차 다 파악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이다. 제품의 원료도 모르면서 소비자의 안전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 가습기살균제 참사란 그런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청문회 이후 나는 제품 원료를 파악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를 꺼내는 기업을 만난 적이 없다. 제품 원료를 파악하는 것이 공급망 협조를 필요로 하는 일이라 쉽지 않다는 호소는 듣지만, 그래도 열심히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얘기를 기업으로부터 듣고 있다. 실제로 2017년 2월부터 2019년 2월까지 생활화학제품 안전관리를 위한 자발적 협약이 추진되었고, 20개 가까운 기업이 전 성분을 확인하여 공개했다. 현재 환경부 초록누리 사이트에는 1125건의 생활화학제품 전 성분 정보가 공개되고 있다. 나는 기업이 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고 저절로 응원하게 되었다. 2019년 6월, 이번에는 정부와 기업만이 아니라 시민사회단체까지 함께하는 2차 자발적 협약이 추진되었다. 제품의 전 성분이 확인되었으니, 그 원료 성분의 유해성을 일일이 따져서 유해성이 낮은 원료를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내가 만난 한국 사회의 정부와 기업과 시민사회단체는 가습기살균제 참사로 인한 극도의 불신 상태로부터 벗어나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이렇게 협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화학물질등록및평가법(화평법)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지고 있다. 2018년 화평법이 개정되어 1t 이상 모든 화학물질의 등록이 추진될 것이기 때문이다. 화평법이 정착되면, 생활화학제품 제조사가 자신이 사용하는 원료 성분이 가진 위험을 평가할 양질의 정보를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 소비자 안전이 한층 높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너무도 속상한 상황을 마주한다. 2013년 국정농단 시기에 기업이 화평법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경제단체들이 다시 이 주장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나와 함께 일해 온 기업들은 경제단체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신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쌓아온 노력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까지 들린다. 국민과 기업이 서로를 신뢰할 수 있는 사회란 좋은 법률이 있고 그 법률을 기업이 지키는 사회이다. 화평법은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가 선택한 신뢰의 수단이다.
경제단체의 몰지각한 주장은 일선 기업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점을 국민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가습기살균제 참사를 반성하고 노력하고 있는 일선 기업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과거 국정농단을 주도한 경제단체들이 특정 기업과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발언하는 것 때문에 선량한 기업들이 비난받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