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일과건강 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노동자 건강권 운동, 식탁 위 쇠고기처럼' 내용의 하나 입니다. 글의 필자는 민주노총 경기지역본부 법률원/반올림 활동가 이종란 님이며 게재된 사진과 글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고맙습니다.


서러운 죽음, 진상규명이라도

19살 어린나이에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 취업을 나갔다가 불과 2년 만에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결려 결국 세상을 떠난 고 황유미 씨 이야기는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익숙한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바로 반도체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이 시작된 계기는 고 황유미 씨의 서러운 죽음에 끝까지 진상규명을 원한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노동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삼성에 노조건설을 염원한 그녀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아버님의 노력덕분에 작년 11월 20일, ‘삼성반도체 집단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현재는 대책위를 반올림이라 부릅니다)가 발족을 한 것이죠.

 

제보로 모아진 혈액암·불임·희귀질병 피해자들

위와 같은 기막힌 사연은 단지 황유미 씨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책위 활동이 시작된 1년 동안 현재까지 20여명에 달하는 혈액암(백혈병, 악성 림프종, 재생불량성 빈혈) 피해자가 확인되었고(2008년 11월 현재) 다른 암들과 희귀질병도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라인 stepper 공정(자외선 등을 이용한 공정)에서 일하다가 쌍둥이를 둘 다 유산하고 결국 자산도 암으로 사망한 노동자 사연, 고3 나이로 기흥공장에 입사해서 thin film(박막) 공정에서 일하다가 말초신경계 질환인 ‘다발성 신경염증’(몇 해 전 태국 여성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말헥산이라는 유기용제에 중독되어 걸린 병과 같음)에 걸려 갖은 고생을 한 여성노동자 이야기, 일종의 혈관염이라는 희귀병인 육아종에 걸려 투병중인 노동자 이야기, 흑색종으로 사망한 분, 20대 나이에 직장암에 걸린 여성노동자, 뇌종양에 걸린 분, 사구체 신염으로 고생하시는 여성노동자, 함께 일한 동료의 아기가 사지가 뒤틀리는 기형으로 태어났다는 이야기, 발가락이 없이 태어난 아이도 있고, 아예 아이를 갖지 못하고 지내는 부부, 입사 전에는 안 그랬는데 입사이후 1년에 생리를 한두 번밖에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유산을 겪은 여성노동자 이야기는 비일비재합니다.

 

반도체 공정에 수십 가지의 화학물질과 유독가스 및 방사선까지 사용된다는 것은 알지만, 직업병 피해사례 연구는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학술이나 운동에서 다루어진 적이 없어 해외사례를 찾아보았더니, 이미 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도 미국, 영국, 대만 등 여러 나라에서 각종 암과 불건강에 대항하여 싸워오고 있었습니다.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반도체 산업에 숨겨진 비밀이 있는 것이죠. 상황에 이렇다보니 반도체 산업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건강권 문제로 의제를 확장할 필요성이 생겼고, 대책위보다는 좀 더 지속적으로 활동을 할 수 있고, 대중적이고 현장노동자들과 함께 나눌 수 있기 위해 대책위 이름을 “반올림(sharps, 반도체노동자 건강과 인권지킴이)”라고 새롭게 개명했습니다.

 

개인이든 단체든 반도체 혹은 전자산업노동자들의 건강권 문제를 나누고 싶으면 누구나 반올림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시작단계라고 생각합니다. 반올림이 한시적인 대책위가 아니라 끈질기게 싸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반올림은 산재인정, 진상규명과 동시에 반도체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확보’를 큰 목표로 하기 때문입니다. 직업병 원인물질, 발암물질을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죽거나 아프지 않기 위해서는 위험물질을 사용하지 않을 권리, 작업속도를 조절할 수 있는 권리, 위험하면 작업을 중지할 권리 등이 현장에서 발현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 바로 노동3권 확보이고 이는 정말 끈질긴 투쟁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_20090102_595_1164.jpg
반올림 활동은 피해자와 유족들의 적극 결합이 바탕되어 움직인다. 지난 10월 7일 노동부 국감에 앞서

과천 정부청사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피해자가 증언을 하고 있다. ⓒ 이현정

 

 

추모제 토론회 국제연대로 삼성 행태 고발 

이러한 반올림활동이 시작된 지 벌써 만 1년이 되었습니다. 2008년 반올림 주요활동을 상기해보면 참 많은 활동들이 있었습니다. 반올림의 구성원인 노안활동가, 금속노조 삼성대책위 활동가, 경기지역 인권,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이 함께 벌인 활동들은 일일이 다 열거하기 벅찰 정도입니다.

 

일단 지속적으로 한 사업으로는 매월 2일 현장노동자와 시민을 상대로 선전전을 벌였고 온라인 홍보, 공장 주변 현수막 부착 등 제보자 찾기 운동, 산재피해자 상담과 산재신청 지원을 하고, 피해자 모임도 하고, 투병중인 노동자 돕기 헌혈증 및 모금운동, 산재인정과 제대로 된 역학조사 등을 위한 노동부·산업안전공단·근로복지공단 등 관계기간을 상대로 면담, 기자회견 등의 대응활동 입니다.


3월 고 황유미 씨 추모제, 8월 이숙영, 황민웅 씨 추모제를 통해 죽은 자를 추모하고 산자들은 투쟁 결의를 다졌다. 4월 25일에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앞에서 의미있는 삼성규탄집회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9월에는 삼성반도체 공장이 있는 경기지역과 충남지역에서 공개 토론회를 열어 좀 더 많은 이들과 반올림 사례 및 해외사례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토론회를 출발로 해서 충남지역에서는 반올림의 지역조직일수 있는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가 발족(10월)하는 성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9월말에는 ‘아시아 재해노동자 권리를 위한 네트워크(ANROAV)’ 회의에 참석하여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례를 발표하고 전자산업노동자 건강권과 관련한 토론을 하는 의미있는 국제연대 기회도 가졌습니다. 10월 국정감사에서도 삼성반도체 백혈병 문제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피해노동자 김옥이 씨와 피해유가족이자 삼성반도체 노동자 출신인 정애정씨가 참고인 자격으로 출석해서 삼성반도체에 안전교육이 전무한 점, 현장에 유해물질을 사용하지만 보호구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자리가 있었습니다.

 

현재 반올림은 12월내로 예정된 역학조사의 평가위원회 및 결과발표에 앞서 또 분주합니다. 평범한 많은 사람들이 김용철 변호사 양심고백 사건과 태안 기름유출사건, 핸드폰 위치추적 사건 등을 통해 삼성이 어떤 곳인지 짐작을 합니다. 반올림은 삼성이 그동안 어떻게 산재은폐를 해왔는지 직간접으로 경험하였기에 삼성의 산재은폐 속에서 진행되는 역학조사가 충분히 왜곡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산업안전공단과 노동부를 상대로 대책위 참여와 정보공개, 신뢰할만한 객관적 자료에 근거한 조사인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습니다.

 

활동 밑바탕엔 피해자와 유족들의 헌신이

활동에서 얻은 소중한 성과라면, 우선, 늘 한결같이 헌신적으로 반올림 활동을 해온 동지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대권력 삼성 앞에서 용기있게 작업 현장의 실상을 들려주는 제보자들, 투병과 간호로 지친 피해자와 가족들이 힘을 내어 진실을 이야기하는 현실 그 자체입니다. 이는 또한 골병의 현장을 바꾸고 싶은 노동자들의 열망이라 생각됩니다.

 

그 중 앞서 소개한 고 황유미 씨의 아버님 황상기 씨의 헌신은 언제나 저희 활동의 밑거름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 황민웅의 아내였던 정애정씨가 반올림 활동을 누구보다 정성스럽게 하는 것은 너무 감사하고 존경스런 일입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국감장에서 끝까지 최선을 다한 김옥이 씨도 너무 존경스럽습니다.

한편, 금속노조에서 적극적으로 삼성노동자 조직화 사업의 일환으로 반올림의 여러 사업에 함께 하는 점(피해자 한명 한명의 사연을 동영상으로 만든 작업, 집회의 성공적 개최나 선전물 공동제작 등)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c_20090102_595_1165.jpg

투명한 역학조사와 정보공개를 노동부 면담에서 요구하였지만 매번 벽에 부딪혀야 했다. ⓒ 이현정

 

 

재력과 정보력 갖춘 회사가 비(非)산재 입증해야

소중한 성과라고 소개한 부분과 겹치지만 여전히 제보자 찾기와 산재피해자를 조직하는 운동이 가장 어렵습니다. 제보를 주었다가 다시 회사의 압력으로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사정했던 한 노동자 이야기는 정말 가슴 아픈 기억입니다. 또 오랜 투병으로 기력이 완전히 쇠한 몸으로 산재신청을 위해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진술해야 하는 과정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핑 도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산재인정 방식이 가장 어려운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방식은 아픈 사람보고 인과관계를 입증하라는 방식인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좋은 정보와 재정력이 있는 회사가 직업병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입증하지 못하면 산재로 인정해주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게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반올림의 상대는 삼성인데 노동부나 산업안전공단은 삼성이 주는 인사정보 등에 너무 의존하는 방식으로 조사를 합니다.

 

c_20090102_595_1166.jpg

유족들은 삼성 행태를 고발하는 곳이라면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사진은 지난 11월 9일

노동자대회에서 연설하는 삼성백혈병 피해자 유족 황상기 씨(왼쪽)와 정애정 씨. ⓒ 이현정

 

 

 

노조건설로 스스로를 보호해야

일단 역학조사 평가위원회의 결과가 12월 안으로 나온다고 하므로 그 결과가 활동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평가위 결과 위험도가 높게 나오건, 낮게 나오건 그것이 끝이 아니기에 어떤 결과가 나오건 그동안 해온 여러 활동들은 모두 계속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조사과정을 철저히 비공개 하면서도 회사의 협조를 구해서야 재직현황 및 인사자료 확보가 가능하다니 제대로 된 조사가 나올지 의문스럽습니다.

 

앞으로는 백혈병 산재조직 뿐만 아니라 앞서 이야기한 수많은 질병들에 대한 직업병 인정투쟁은 계속 될 것입니다. 또한 발암물질과 생식독성, 신장독성을 가진 물질을 규제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현장노동자들이 자기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노동조합 건설을 지원하는 활동도 주요하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409 [다시 불붙는 산재법 개정 요구] ③첨단산업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소송 file 2012.03.10
408 [다시 불붙는 산재법 개정 요구] ③첨단산업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소송 file 2012.03.10
407 [다시 불붙는 산재법 개정 요구] ② ‘근무 중 사고’ 산재불인정 급증 file 2012.03.10
406 [다시 불붙는 산재법 개정 요구] ①법원으로 몰려드는 산재노동자들 file 2012.03.10
405 간단한 절차·신속한 구제기능 갖춘 석면특별법 시급하다 file 2012.03.10
404 석면노출 고위험 직업 더 있다 [2] file 2012.03.10
403 추락만큼 무서운 석면, 건설노동자 폐가 무너진다 file 2012.03.10
402 석면은 당장 먹고사는 문제는 아니더라? file 2012.03.10
401 근본 개선대책 마련으로 벼랑 끝 건설안전 구하자 [1] file 2012.03.10
400 중요도 없이 일률 적용하는 법체계, 재해예방 효과없다 file 2012.03.10
399 촛불운동 시사점 자양분 삼아 2009년 밝히자 file 2012.03.10
398 울타리 뛰어넘을 안전보건 활동 주체 세우자 file 2012.03.10
397 '우리'가 요구하면 현장이 달라진다 file 2012.03.10
396 일상활동 강화시킨 100인 이하 사업과 MSDS 실태조사 file 2012.03.10
395 존재감 키운 2008년 4.28추모제에 길을 묻다 file 2012.03.10
» 수십 가지 화학물질 유독가스 방사선 사용해도 직업병 없다? file 2012.03.09
393 작업장과 소비영역의 이중성 극복해야 미래가 달콤하다 [14] file 2012.03.09
392 3만5천 하청노동자 건강권과 인간다운 삶 위한 주간연속2교대제로 file 2012.03.09
391 노동시간 단축과 생산물량/임금보전의 함수를 풀어라 file 2012.03.09
390 노동자 양극화 위기 넘어설 가능성을 열다 file 2012.03.09
389 노동자건강권 쟁취 바람몰이, 4월 사업 시작! file 2012.03.09
388 노동안전보건을 민주노총 골간사업으로! file 2012.03.09
387 대중과 호흡하는 4월 사업이 기다려진다 file 2012.03.09
386 노동안전에 봄바람을! 달려라 순회투쟁단 file 2012.03.09
385 길거리에서 죽어간 노동자들을 기억하라 2012.03.09
384 장시간 중노동, 다발하는 산재…대책은 없다? file 2012.03.09
383 미사・기도회・예배・법회에서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합시다 file 2012.03.09
382 나의 과로 지수는? file 2012.03.09
381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건으로 본 미조직 대기업 노동자의 건강권 file 2012.03.09
380 성서공단 밑바닥 노동자 이야기 file 2012.03.09
Name
E-mail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