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장보고서⑵ 미국 알권리란 무엇인가?
글 : 김신범(노동환경건강연구소 화학물질센터 실장)
1. 보팔사고만 아닌 운동에 의해 제정된 알권리법, 왜곡된 인식을 수정하다
보팔사고는 워낙 유명한 참사이다. 1984년 12월 인도의 보팔지역에서 발생된 화학물질 누출사고로 인해 수십 만 명의 피해자가 발생하였다. 정확한 집계가 되지 않아 주장하는 곳마다 피해자의 규모가 다를 정도이다. 보팔사고에 대해서는 최근 <시론>에서 다룬 바 있으니, 아직 읽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시론 - 보팔 참사 30년을 다시 돌아보며).
보팔사고는 1984년 말에 발생하였고, 미국의 지역사회알권리법은 1986년에 제정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보팔사고 때문에 지역사회알권리법이 제정되었다고 생각했다. 수많은 문헌들도 그렇게 설명했다. 아주 자연스러웠다. 이게 함정이었다. 대형 참사는 분명 제도의 개혁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지만, 모든 참사가 다 그렇게 연결되지는 않는다. 운동이 준비된 상태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 아니겠는가? 보팔사고라는 너무도 큰 참사에 가려진 미국의 알권리운동을 알게 된 것은 이번 미국 출장의 큰 성과였다.
출장을 앞두고 지역사회알권리법에 대한 공부를 해나갔다. 보면 볼수록 신기했다. 사업장의 화학물질 정보를 노동자 뿐 아니라 지역주민들에게 이렇게 광범위하게 제대로 제공해주는 법률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사고에 대한 비상계획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협의체에서 수립하도록 하고 협의체가 가진 정보는 주민들에게 모두 공개된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이 있었다. 연방법은 보통 주법보다 우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미국에서, 지역사회알권리법은 최소한의 법률이니 주법을 더 강하게 만들라고 요구하는 태도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아무리 보팔사고가 있었다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법률이 하늘에서 떨어질 리는 없었다.
뭔가 줄줄이 달려나올 때, 고구마 캐는 것에 비유를 한다. 막상 관심을 가지니 1986년 지역사회알권리법 이전의 알권리 운동과 지역별 조례와 법률들이 줄줄이 캐어져 놓이기 시작했다. 아이쿠야. 큰 일 날 뻔 했다. 내가 정작 배워야 할 것은 완성된 지역사회알권리법이 아니라, 그 법률이 어떤 노력으로 만들어졌는지가 아니었던가.
출발은 산업안전보건법부터였다. 1970년 미국에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에서는 노동자들이 노출되는 위험에 대해 라벨이 필요하고 적절한 경고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1974년 산업안전보건청(OSHA) 산하 국립산업안전보건연구원(NIOSH)에서 유해물질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라벨 등에 관한 기준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석면 등 특별한 물질들에 대해 라벨이나 경고를 도입한 것 외에 전체 화학물질을 대상으로는 기준이 제정되지 않고 있었다. 1970년대 말까지도 이 상태가 유지되면서 더 이상 안되겠다고 판단한 미국 노동운동은 카터대통령에게 알권리기준을 제정하도록 요구한다. 물질의 성분을 정확히 알아야겠다는 것이 핵심 요구였다. 특히, 라벨에다가 성분명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물질안전보건자료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 노동운동의 입장이었다. 사업주들이 물질의 독성을 제대로 조사할리 없으니 물질명만 분명하게 밝히면, 정보는 노동조합이 전문가와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파악할 수 있다는 태도였다. 물론, 기업의 반대가 대단했다. 길고 긴 싸움 끝에 카터 행정부는 1981년 1월 임기 말에 알권리에 대한 기준(안)을 제출하였다. 이제 노동자들은 화학물질의 성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일할 수 있게 될 것처럼 보였다. 보통 관례상 이전 정부가 추진한 법률안은 다음 정부에서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음 대통령이 규제완화를 전면에 내세운 레이건이었기 때문이다.
2. 레이건 그리고 역전의 역전, 다시 후퇴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카터정부의 알권리에 대한 기준(안)이 제출된 지 한 달도 채 안되어 기준(안)은 폐지되었다. 신임 노동부장관의 결정이었다. 기업은 정말로 재빠르게 움직였다. 아직 의회는 민주당이 다수였지만, 레이건 정부 하에서 알권리법을 제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였다. 의회 공청회가 계속 열렸지만 소득은 없었다. 연방 차원의 노력 보다는 지역에서 도전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미 지역별로는 그런 움직임이 추진되고 있기도 했다. 이 때 노동안전보건연대 같은 지역의 안전보건운동단체들이 큰 역할을 하였다. 한 예로, 필라델피아의 경우 암환자가 급증하고 있었기 때문에 알권리법률을 주에서 제정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기 힘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자칫하다가 정치적 생명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보수 정치인들에게까지 형성되었다. 전미자동차노조 대의원 한 명은 필라델피아 시에서 열린 공청회에 가스통을 들고 들어가 밸브를 열어버렸다. 가스에 노출된 모든 사람들이 성분을 알려달라 했지만, 자신이 매일 사용하는 물질이니 괜찮다며 입을 닫아버렸다. 나중에 압축공기였다는 사실을 밝히기는 했지만, 알권리가 왜 필요한지 실감나는 퍼포먼스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뉴욕, 뉴저지, 필라델피아 등 곳곳에서 노동자와 주민의 알권리에 대한 조례와 법률이 제정되기 시작했다.
거대 화학자본들은 이제 다급해졌다. 연방법을 무력화하였더니 카터 정부의 법률보다 더 강력한 법률이 주별로 시행되게 된 것이다. 주마다 법률이 다르니 일일이 따로 대응해야 하는 불편함까지 가중되었다. 화학자본들은 레이건 정부에게 연방법을 제정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연방법을 제정하여 연방법 우선의 원칙을 내세우면서 주법을 무력화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연방법이 다른 어떤 법보다 우선한다는 내용을 명시하게 되면, 기존 주법률 중에서 동일한 주제를 다른 법률들은 더 이상 효력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 미국의 제도였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1983년 산업안전보건법의 유해물질정보전달에관한기준(Hazard Communication Standard)이었다. 기업비밀은 자유롭게 인정될 수 있게 하였고, 라벨에는 별 정보가 제공되지 않도록 하였으며, 물질안전보건자료만 비치하고 교육하면 되도록 하였다. 게다가 제조업에만 이 법률이 적용되도록 하였고, 물질의 종류도 제한했다. 노출기준이 마련된 600 종 정도의 물질만 정보제공의 의무를 두었다.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 미국공중보건학회 같은 전문가 집단 모두 반발하였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결국, 노동조합은 소송을 통해 제조업에만 국한한 법률은 옳지 않다는 판결을 받아냈지만, 기업비밀만큼은 뒤집지 못하였다. 각 주별로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알권리법이라고 이름 붙여졌던 법률들은 이제 노동자는 대상에서 제외해야 했다. 대신 지역주민의 알권리는 연방법에 해당되는 것이 없었으므로 남아있게 되었다.
3. 어라, 모든 MSDS가 공개대상이라고?
하지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주별로 제정된 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알권리법은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었다. 우선, 사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정보가 주민에게 공개되기 시작했다. 소방관들이 제일 좋아했다. 공장에서 불이 날 경우 마스크는 뭘 쓰고 들어가면 좋은지, 주민을 대피시키는게 좋을지 말지 판단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장 굴뚝으로 배출되는 화학물질 배출량에 대해 조사를 하여 그 결과를 지역주민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일부 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보팔사고가 터졌다.
자, 이제 명확해졌다. 보팔사고가 미국의 지역사회알권리법을 만든게 아니라는 것이 말이다. 보팔사고는 연방법을 그렇게 만들도록 한 계기로서 작용한 것은 맞지만, 주별로 풀뿌리 운동과 결합한 안전보건환경 운동이 존재했기 때문에 법이 제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별로 이미 지역사회알권리법의 형태가 완성되어 있었고, 연방법은 그것을 모아냈을 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다. 운동이 준비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보팔사고를 계기로 좋은 제도를 확립하도록 이끈 것이다. 그리고, 1983년 산업안전보건법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지역사회알권리에 대한 연방법은 최소한의 규정으로서 각 주에서 더 좋은 법을 제정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내용이 명확하게 들어가게 되었다. 두 번 다시 같은 패배는 하지 않는 오기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승리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환경부는 애초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지역주민이 취급량 정보를 받아볼 수 있도록 기획했다. 하지만,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기업의 반발만이 아니라 지역의 행정력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현실적인 문제제기들이 컸다. 결국, 1만 파운드 이상(유독물은 500파운드 이상)만 취급량 정보를 공개하는 것으로 했다. 하지만, 물질안전보건자료만큼은 1만 파운드 미만으로 취급하더라도, 주민이 요청할 경우 무조건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이럴수가. 솔직히 한국에서만 살아온 나는 물질안전보건자료는 기업 내부 정보라서 주민들이 이걸 얻기가 하늘에 별따기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모든 물질안전보건자료가 주민에게 제공되어야 하는 법률이 존재할 줄이야! 취급량 조차도 기업비밀이 아니라니! 그럼 도대체 기업비밀은 뭐란 말인가?
미국 출장시 바스프(BASF)와 다우(DOW)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들로부터 들은 얘기는 화학물질 명칭 같은 것은 거의 기업비밀이 없으며, 테러 때문에 저장장소만 비공개로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이 정말로 비밀이라고 생각하는 물질명 같은 정보는 환경부에게 사전에 자료를 제출해서 비밀로 인정받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공개였다. 그 절차가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4. 미국 알권리의 실체
산업안전보건법을 기업이 만들어내면서 물질안전보건자료의 기업비밀은 자유롭게 인정되도록 하였지만, 환경부의 지역사회알권리법을 주민과 노동자들이 만들어내면서 화학물질 성분을 비밀로 하려면 사전 승인을 얻도록 하였다. 이런 모순 상황이 미국 알권리의 현재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알권리를 위한 주민과 노동자들의 투쟁, 그리고 기업의 반발과 로비가 서로 부딪치면서 그 결과로 현재의 알권리 제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알권리를 위한 장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경부로부터 나오는 모든 화학물질정보를 쉽게 한눈에 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도록 지원하는 민간네트워크가 있다. 바로 알권리네트워크(RTKNET)이다. 이들은 환경부의 정보를 가지고 지역별로 지도를 그려서 독성물질 공장 반경 1마일 이내에 학교와 병원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주민들에게 쉽게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공장의 사업주를 만나 안전하게 관리하도록 요구하게 이끌고 있다. 알권리가 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 존재하도록 하는 네트워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참 대단한 일이구나 싶었다.
이제야 나는 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알권리란 무엇일까? 알면 좋겠다 정도의 알권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알권리라는 자각이 충분히 우리에게 존재하는가? 우리 운동은 그만큼 깊이 고민하고 있나? 알권리가 보장된다 해도 막상 사용할 능력은 있는 것일까? 주민들과 노동자들에게 화학물질 정보를 전달할 방법을 우린 마련할 수 있을까?
미국의 알권리 실체는 좋은 법률(지역사회 알권리법) 또는 엉망인 법률(산업안전보건법)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알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온 풀뿌리 조직들과 그들의 네트워크, 그리고 이들을 지원하는 내공있는 전문가들. 이들이 바로 미국 알권리의 실체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