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의학 전문의이자 변호사인 박영만 선생님께서 일과 건강 2007년 4월호에 기고하신 내용입니다.
담배와 폐암, 그 인과관계
변호사․산업의학전문의 박영만
일과건강, 2007년 4월호
1. 들어가는 말
최근 선고된 담배소송 판결(99가합104973)은 흡연과 폐암 사이의 통계적이고 일반적인 인과관계, 즉 역학적 인과관계는 인정하면서도 원고들에게 발생한 폐암이 바로 그 흡연 때문에 발생하였다는 개별적 인과관계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폐암은 흡연 이외 다른 원인으로 발생할 수 있고 비흡연자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므로, 역학적 인과관계를 개별적 인과관계에 직접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래서 원고들은 자신의 폐암이 흡연 때문이라는 점을 직접 입증하지 못하여 패소한 것이다. 그러나 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역학적 인과관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2. 연관성과 인과관계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서는 2개의 현상이 연관되어 나타날 때 그것이 원인과 결과인 관계가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연관성을 보이는 것에 불과한지를 구별해야 한다. 연관성(Association)이란 “A가 존재할 때 B의 발생확률이 A가 존재하지 않을 때보다 높거나 낮은 관계”를 의미한다. 통계적인 연관성이란 통계적으로 유의(Significance)한 연관성이 있다는 의미로 두개의 현상이 우연하게 연관되어 나타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을 말한다. 원인적 연관성이란 “A의 양과 질이 변함에 따라 B의 양과 질도 변화하는 관계”를 말한다. 비원인적 연관성이란 두 개의 현상 사이에 통계적 연관성은 있으나 원인적 연관성은 인정할 수 없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는 우연(chance)이나 혼란변수(confounding variable) 때문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1965년도에 영국의 힐(Austin Bradford Hill)은 원인적 인과관계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시간적 선후관계, 용량반응관계 등 9가지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역학적 인과관계 판단은 통계적인 연관성에서 시작하지만 어떤 질병과 요인 간에 의미 있는 연관성이 있다고 하여 반드시 역학적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최종적인 역학적 판단은 인과관계 판단기준을 통해 신중하게 내려야 한다.
3. 역학(疫學)적 인과관계
어떤 유해인자 때문에 집단적으로 질병(疫病)이 발생하고, 임상의학 또는 병리학적으로 질병의 원인과 발병기전이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경우에는 먼저 역학조사를 통해 질병과 관련된 요인들 중 원인으로 의심되는 것을 찾아내야 한다. 역학은 질병과 특정 인자 사이의 인과관계를 통계적 방법으로 밝히고 그 결과에 따라 질병을 예방하는 학문이다. 역학의 목적은 인구집단에 발생하는 질병 예방이므로 질병의 최종적 원인을 규명하지 않더라도, 어떤 요인과 질병 사이에 원인적 연관성이 의심되면 잠정적이나마 이를 원인으로 간주하고 예방에 활용한다.
판결문에서 역학은 “폐결핵, 콜레라 등과 같이 특정 병인에 의해 발생하고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대응하는 이른바 특이성질환을 연구대상으로 발전해 온 학문”이라고 전제한 다음, “발생원인 및 기전이 복잡다기하고, 여러 가지 선천적․후천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병하는 비특이성 질환(폐암)”에서는 역학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과거에 역학은 전염병이 유행하면 일차적으로 전염병의 원인으로 의심되는 인자들을 걸러내는 역할을 하였다. 정확한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것은 임상의와 병리학자들의 몫이었다. 폐결핵의 원인이 결핵균이라는 사실은 역학과 임상의학, 병리학이 합작하여 밝혀낸 것이다. 역학적 연구를 통해 결핵의 원인이 어떠한 감염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코흐(Robert Koch)는 수차례의 실험 끝에 환자의 조직에서 결핵균을 분리하여 그것이 결핵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혔다. 그러나 모든 질병의 원인이 반드시 임상의학적․병리학적으로만 밝혀지는 것은 아니다. 폐에 발생한 암 조직을 병리학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폐암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 아니다. 병리학이 힘을 발하는 때는 같은 증상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질환 중에서 하나의 질병을 감별진단 할 때이다. 만성위궤양과 위암은 임상의학적으로 구별하기가 매우 어렵다. 환자의 증상이나 방사선검사결과가 흡사하기 때문에 이 둘을 감별하려면 위조직을 떼어내 현미경으로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다.
전염병시대를 거치면서 발달한 코호트연구, 무작위대조시험 등 역학적 방법론은 현재 여러 가지 급․만성질환의 원인과 질병 진행에 관여하는 인자들을 밝히고 신약임상시험에서 약물의 효과를 검정하는 데까지 사용하고 있다. 현대역학은 만성병 관련요인들의 위험도는 물론 요인들 사이 상호작용까지 밝혀내고 있다. 담배와 폐암 사이의 인과관계도 이미 현대역학이 조사와 실험을 통해 자연과학적으로 밝혀낸바 있다. 담배가 폐암의 원인이라는 사실은 수많은 연구에서 확인되어 의학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담배연기가 일으키는 질병은 대부분 만성질환으로 연구기간이 오래 걸리고 연구비용이 많이 든다. 또한 발병기간이 오래이다 보니 혼란변수도 많다. 실험실 연구로는 담배의 해악을 전부 파악할 수 없다. 담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도 임상의학적․병리학적 연구보다는 역학적 연구에 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4. 역학이 밝혀낸 담배의 발암성
벤젠은 백혈병을 일으키는 발암물질이다. 우리나라의 벤젠 노출기준은 하루 8시간 근무를 기준으로 할 때 1ppm이다. 근로자가 작업 중 100~200ppm의 벤젠에 10년 정도 노출되었을 때 백혈병에 걸릴 확률은 일반인의 약 2~7배이다. 이에 비해 성인남자가 20년간 하루 2갑씩 담배를 피울 경우 폐암에 걸릴 확률은 비흡연자에 비해 60~70배 정도 증가한다. 현재 담배를 피우고 있다면 앞으로 폐암에 걸릴 위험은 비흡연자의 22배이다. 각종 암을 비롯한 호흡기질환, 심근경색, 뇌혈관질환으로 사망할 위험도 비흡연자의 2배이다.
담배는 기호품이 아니다. 알코올을 규칙적으로 소량 섭취할 경우 심혈관질환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다. 커피도 하루 2잔 이내인 경우 인체에 유해한 영향을 미치지 않고 정신집중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담배는 한 모금만 그 연기를 흡입해도 인체에 유해한, 글자 그대로 백해무익한 발암물질 덩어리이다.
판결문에서 “폐암은 … 흡연 이외의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발병할 수 있고 비흡연자에게서도 발병할 수 있으므로, 역학적 인과관계를 개별적 인과관계에 직접 적용하기 어렵다.”고 한 뒤 폐암의 유해요인으로 흡연, 유전적 소인, 폐질환 병력, 고지방 식이, 직업적 유해인자, 대기오염, 알코올 등을 거론하였다. 그러나 유전적소인, 폐질환병력, 대기오염 등은 폐암 발생에 부차적인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인자들도 폐암 발생과 진행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그것은 담배를 제외했을 때나 의미가 있다. 석면 같은 직업적 유해인자 정도가 폐암 발생에 상당 정도 관여할 뿐이다. 폐암에서 흡연이 차지하는 비중이 85%라면 나머지 유해인자로 인한 폐암은 모두 합쳐서 15%에 불과하다.
5. 법적 인과관계
손해배상소송에서 피해자에게 발생한 질병이 어떤 유해물질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하려면 우선 그 물질이 당해 질병을 야기할 수 있다는 ‘일반적 인과관계’가 증명되어야 하고, 나아가 피해자가 그 물질에 노출되어 실제로 그 질병이 발생하였다는 ‘개별적 인과관계’까지 증명되어야 한다. 역학은 자연과학적 인과관계를 밝히는 도구라고 할 수 있으므로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손해배상법적인 일반적 인과관계도 증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힐의 역학적 인과관계 판단기준은 서로 중복되기도 하고 맞지 않는 것도 있어 많은 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다. 따라서 힐의 인과관계 판단기준 중 시간적 선후관계, 강한 통계적 연관성, 기존 지식과 일치성 등 3가지 조건을 갖추면 법적 판단에 필요한 역학적 인과관계는 갖춘 것으로 볼 수 있다.
판결문은 “역학적 인과관계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다른 요인들이 모두 같다는 가정 아래 추출한 특정 요인과 질병 사이의 통계적(확률적) 관련성”이므로 역학적 연구결과를 “특정인의 인과관계를 규명하는 데에 직접 적용시킬 수는 없다.”고 한다. 물론 역학의 목적은 인구집단의 질병예방이므로 역학의 결론을 그대로 특정인에게 적용할 수 없다. 그러나 역학적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은 2개의 현상 사이에 단순한 통계적 연관성을 넘어 원인적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학적 인과관계가 인정된다면 상당량의 유해물질에 노출된 피해자에게 개별적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은 적어도 강한 ‘사실상 추정’을 받는다고 보아야 한다. 개별 피해자가 유해물질에 노출된 후 특정 질병이 발생한 사실이 인정되면 다른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해자의 질병은 그 유해물질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물론 원고가 직업적으로 발암물질에 노출된 사실 등 다른 특별한 사정은 피고 측에서 반증으로 증명해야 할 것이다.
6. 맺는 말
현대과학은 확률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고전 역학(力學)에서는 어떤 물체의 운동방정식을 알면 그 물체의 과거와 미래를 정확하고 결정적으로 기술할 수 있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따르면 미시세계에서는 소립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다만 특정한 시각에 특정한 위치에서 소립자를 관찰할 확률만을 알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의학도 마찬가지이다. 질병 발생에는 유해인자, 숙주, 환경이라는 3대 요인이 상호작용한다. 폐암 발생에는 첫째, 담배와 직업적 발암물질 등 유해인자, 둘째, 환자의 나이, 면역력, 생활습관, 유전적 요인 등 숙주요인, 셋째, 생활환경, 대기오염 등 환경요인이 상호작용한다. 확률을 빼고 본다면 폐암 발생에 관여한 인자들을 모두 동일한 정도로 관리해야 폐암 발생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임상의사가 진료를 할 때 또는 보건담당자가 정책을 세울 때에는 질병 발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 현대의학이 밝혀낸 가장 확실한 발암물질은 담배일 것이다. 판결문상 볼 수 있는 원고들 폐암의 직접적 원인도 의학적으로나 법적으로나 담배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