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0 15:42
노동자 입증책임 전환, 의료기관이 산재신청토록 개정
유해화학물질 실시간 리스트작성 위원회 법제화 필요
삼성전자 노동자의 백혈병 산재인정 판결을 계기로 산재법을 개정하려는 국회의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27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속 이미경 정동영 홍영표 홍희덕 의원은 노동건강연대 참여연대와 함께 '삼성백혈병 사건을 통해 본 산재보험법 개정방안' 토론회를 국회 의정관에서 열었다. 토론회는 4명의 의원들이 제출할 산재법 개정안에 대한 여론수렴 절차를 겸한 것으로서 삼성 백혈병 노동자를 지원해 온 이종란 노무사와 임준 노동건강연대 대표가 발제하고, 다수의 전문가들이 토론에 참여했다.
개정안은 업무상 질병의 범위에 대해 근로기준법 시행령상 업무상 질병으로 분류된 질환에 걸린 노동자에 대해서는 "업무상 요인에 의하여 이환된 질병이 아니라는 명백한 반증이 없는 한 이를 업무상 질병으로 본다"고 확대했다.
또 그동안 재해를 당한 노동자가 신청해야 했던 산재요양신청에 대해 법 개정안은 "의료기관이 대행토록" 했다. 이는 정부나 사업주에 의해 산재사건이 다수 은폐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다. 우리나라는 OECD 평균에 비해 산재인정건수는 5분의 1에 불과하면서 사망자는 3배나 많은 기형적인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부상 등의 산재사고는 다수가 은폐되고, 사망에 이르는 큰 사고의 경우에만 제대로 노출되는 데 원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주장했다.
산재사고가 은폐되고 통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산재정책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의료기관이 치료받으러 온 환자를 상대로 산재보험을 신청할 것인지 건강보험을 적용할 것인지를 판단해 청구하는 주체가 되도록 하면 이같은 은폐행위는 해소될 것으로 보았다. 정부는 현재 사고성 산재는 약 95%를 승인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산재신청 자체를 못하는 경우는 통계에 잡히지 않고 있는데, 신고건수는 전체 산재발생건수의 20%~50%에 불과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사고시 최초 치료단계의 의료기관이 산재를 신청하면 이같은 은폐행위는 사라질 수 있다. 또 사업장에서 발생한 사고의 경우 본인의 자의에 의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산재로 인정받는 길이 열릴 수 있다.
한편 산재신청을 의료기관이 대행토록 하는 것은 재해원인의 입증책임을 정부나 사용자가 지도록 하는 것과 연동된다. 제3자인 의료기관이 객관적인 진료를 통해 산재를 신청하는 것은 산재의 상당인과관계를 보증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이 경우 정부나 사용자가 산재를 용인하기 어렵다면 의료기관의 진료내용을 반박하는 방식으로 반증책임을 지울 수 있다.
이에 따라 개정안은 "업무상 재해가 아님을 입증할 책임은 공단이 부담한다" "공단은 발병원인물질이 인체에 무해하거나 업무상 재해를 유발시키는 것이 아님을 의학적으로 명확히 입증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의원들의 개정안은 이번 삼성 백혈병 산재 사건과 같은 경우에 대해서는 아직 근본대책을 마련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해마다 바뀌는 첨단산업 공정에서 발생하는 직업성 질병에 대한 대책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의 경우 "전자제품 처리능력은 18개월마다 2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생산공정을 바꾼다. 생산공정에 투입되는 화학물질도 달라진다. 이번 사건처럼 4년이나 걸려 겨우 1심판결을 받은 상황에서는 이미 치워져 버린 과거 생산현장을 재현해 역학조사를 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이날 토론회에 나온 참석자들은 이에 대한 보완책으로 독일과 일본처럼 유해물질 판정을 위한 정부내의 상시위원회 설치 필요성을 제기했다.
우송대학교 이현주 교수는 "우리나라의 산재법은 1961년 박정희 정권이 일본의 법을 통째 베껴 옮겨왔는데, 핵심을 잘못 베껴 오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산재법은 유해화학물질과 업무상 질병을 특정해서 몇가지로 열거하고 그 외의 화학물질이나 질병에 대해서는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 '열거주의' 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 교수는 "이같은 방식은 변화하는 산업현장의 실상을 반영하지 못해 큰 문제를 낳고 있는데, 일본은 이에 대해 정부내에 평가국을 두어 실시간으로 유해물질을 재분류한다"고 말했다. 독일도 2개월 단위로 정부내 위원회가 화학물질의 유해성을 재평가함으로써 산업현장의 발전속도를 반영한다고 한다.
이미경 의원은 "실시간으로 산업현장의 화학물질을 평가해 직업성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으로 등록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진병기 기자 j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