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0 15:33
2011년 5월 6일 내일신문 진병기 기자의 기사 입니다. 기사 저작권은 내일신문에 있으며 무단전재, 배포, 복사를 금지합니다.
1988년 원진레이온 사태는 중진국으로 경제가 도약하던 시기에 후진국 경제의 주종이던 섬유산업의 독버섯을 제거하는 진통이었다.
대한민국 유일의 인조비단 비스코스 생산업체로 호황을 누리던 원진레이온은 신경독가스의 원료인 이황화탄소를 노동자에게 노출시킴으로써 수많은 재해를 일으켰다. 팔다리 마비와 언어장애, 정신이상과 콩팥기능 장애를 겪다 사망해도 회사와 정부는 작업과정에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이유로 직업병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자 가족 협의회'와 '원진직업병피해노동자협의회'가 결성되면서 공해연구소와 노동·보건·의료계 인사들이 연대해 10년에 걸쳐 회사와 정부의 진실은폐를 추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시 직업병 규명을 위해 연대한 주요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마침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을 개정해 이황화탄소에 대한 인정기준을 새로 만들었고 직업병 전문기관을 설립하는 등 중진국 경제체제에 맞는 직업병 정책의 틀이 갖춰졌다. 하지만 은폐로 일관했던 원진레이온사는 직업병 왕국의 오명을 쓴 채 10년만에 폐업해야 했다.
◆삼성, 제2의 원진레이온 될 것인가 = 지금 선진국 경제 진입을 앞두고 삼성의 백혈병 논쟁이 뜨겁다. 소수의 유족이나 재해근로자들이 시작한 직업병 인정 요구는 보건·환경·노동·법률단체들이 망라된 '삼성반도체 집단 백혈병 진상규명과 노동기본권 확보를 위한 대책위원회'로 뭉쳤다. 원진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를 비롯한 건강한 노동세상, 다산인권센터,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를 비롯해 전국금속노동조합과 민주노총 등이 망라돼 있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 이미경 의원 등이 지원하고 있다.
현재 대책위에 제보된 직업병 의심 암환자 등은 130명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46명은 사망했다. 삼성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발병실태는 2005년 백혈병에 걸려 2007년 사망한 황유미 사건이 불씨가 되어 4년여만에 드러난 것이다.
여론이 비등하자 정부는 첨단공정인 반도체산업 전체에 대한 역학조사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조사결과는 발암과 작업환경은 무관하다는 것이었다. 황유미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회사에서 지정한 날짜에 들어가서 조사하는 것이 제대로 될 리가 있겠냐"며 정부기관의 발표를 불신했다.
◆삼성, 대형로펌 변호사 대거 투입 = 지난해 1월 황씨를 포함해 5명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직업병 문제가 처음으로 법정에 선 것이다. 삼성은 이 소송에 법무법인 율촌의 변호사들을 대거 투입했다. 피고가 아닌 보조참가인 자격인 삼성이 변호사들을 대거 투입한 것이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
올해 4월 7일 노동자들의 행정소송 3건이 2차로 접수됐다.
고3때 건강한 몸으로 입사한 한혜경씨는 27세에 뇌종양 수술을 받아 지금은 혼자 밥을 먹거나 거동을 할 수 없는 1급 장애인이 됐다. LCD 모듈과에서 인쇄회로기판에 납땜하면서 납과 플럭스 유기용제에 보호도구 없이 노출됐는데, 근로복지공단은 "뇌종양 발병원인이 작업환경과 관련된 근거가 없다"며 산재인정을 거부했다.
현대의학으로 밝혀진 뇌의 비밀은 아직 1%에 불과하다고 한다. 뇌종양의 원인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한씨처럼 인쇄회로기판 제조 노동자에게 뇌암 발병비율이 높다는 1985년 IBM 연구조사결과가 있다.
이윤정씨도 고3때 입사해 반도체 칩을 고온테스트하는 공정에서 6년간 근무한 후 뇌종양에 걸렸다. 뇌종양을 다 제거하지 못해 시한부인생을 선고받았다.
단국대 김현주 산업의학 전문의가 "뇌종양이 주로 발병하는 나이(50세 전후)보다 25년 이상 젊은 나이에 발병한 것으로서, 납 등 다양한 화학물질과 비전리성 방사선에 노출되는 반도체 산업 종사자는 뇌종양 발생 위험이 증가한다"는 소견서를 근로복지공단에 냈다.
20세에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린 유명화씨, 24세 때 다발성 경화증 확진을 받은 이희진씨에 대해서도 공단은 "업무와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며 산재인정을 거부했다. 이희진씨는 오른손과 다리가 마비됐고, 오른쪽 시력을 잃은 상태이며, 뚜렷한 치료제가 없어 진행억제제만을 투여하고 있다.
◆"철거해버린 공정, 재조사는 면피용" = 이처럼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 여부에 대해 정부가 한결같이 내세우는 방패는 "작업환경과 질병의 상당인과관계가 없다"는 논리다.
법무법인 다산의 김칠준 변호사는 "깨끗한 산업으로 오해받고 있는 반도체나 LCD 등 첨단전자산업이 사실은 매우 유해한 산업이며, 20~30대의 젊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면서 "근로복지공단은 빠르게 변모하는 전자산업의 특징은 무시한 채 노동자들에게 입증책임을 요구하는 잘못된 행정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노동자들이 행정소송을 제기한 것은 2008년 법원이 고도의 의학적·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직업병 판정에 대해 반증책임을 정부와 사업주가 져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를 대리하는 박영만 변호사는 "노동자의 입증책임을 완화한 법원의 판례에 기대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삼성은 외국의 컨설팅사에 정밀 재조사를 맡겨 작업환경과 산재의 관련성을 따져보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족이나 피해노동자들은 "이미 공정라인을 철거해 버린 상태에서 외국컨설팅사에 재조사를 맡긴 것은 면피를 위한 여론호도용"이라며 이를 불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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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딸 백혈병 사망, 첫소송 낸 황상기
"모든 피해 보상할테니 회사 비판만 하지말라고 했다"
'삼성의 백혈병'이 지금 사회쟁점으로 크게 울려퍼지게 된 것은 딸을 잃은 한 택시운전사의 집요한 추적활동 때문이다. '거대기업 삼성'을 공격하려는 의도를 가진 특정세력이나 시민단체가 아닌 '천륜의 몸부림'이 '삼성 백혈병 싸움'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황상기씨는 강원도 속초에서 30년간 택시운전에 종사해 왔다. 2007년 3월 6일 둘째딸 유미씨는 병원에 다녀오던 길에 그가 운전하는 택시 안에서 숨졌다.
유미씨가 숨지기 직전 삼성은 '백지 사표'를 받아갔고, 그는 뭔가 있음을 직감했다. "제가 뭘 알아요? 유미가 인터넷 들어갔다 나오는 걸 가르쳐 줬어요. 밤새워서 인터넷 찾아보고 연락해 보고…." 이때부터 그는 수많은 정당과 언론사 노동사회단체를 찾아다니며 딸의 죽음이 반도체 공정에서 사용된 방사능과 화학물질에 원인이 있음을 확신했다.
"수많은 삼성 사람들을 만났지만 한 사람도 인간적으로 진실된 말 한마디 하지 않았어요. 그저 눈앞에서 면피만 하려고 했지요. 거짓말로 덮으려고만 하니 어떻게 믿겠어요." "삼성은 처음엔 '방사능을 쏘지 않고 유독화학물질을 쓰지 않는다'고 하더니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에서 방사능과 벤젠 아르신가스 등 발암물질이 드러나자 이번엔 '수치가 낮아 문제가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는 "현장출입이 회사 허락없이 불가능하고 회사는 이렇게 거짓말만 하는데, 백혈병 원인을 노동자더러 밝히라는 게 말이 돼요?"
그가 피워올린 '삼성 백혈병 싸움'은 4년 가까이 흐른 지난해 연말 소설가 조정래 등 사회인사 534명이 "더이상 진실을 덮지 말라"는 선언으로 뭉쳐서 이슈화됐다.
"삼성 직원들이 지난 연말에 두 번 찾아왔어요. 모든 피해를 보상하겠으니 삼성 비판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유미가 죽고나자 충격으로 할머니가 따라 숨졌고, 어머니는 우울증에 걸렸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번씩 서울로 향하느라 생업을 접었다.
삼성직원들은 이 모든 부분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겠다며 정확한 액수를 산정해 새해에 다시 찾아오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제가 가족들이랑 도움주신 분들하고 통화하는 내용을 도청했는지, 삼성직원들은 그 후 오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요."
그가 낸 '삼성 백혈병' 피해 노동자들의 첫 소송이 지금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진창수 부장판사)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13일 그는 또다시 수원 삼성전자 중앙문과 기흥 삼성반도체 후문에서 1인시위를 했다. "재판에서 질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안해요. 재판부조차 진실을 덮어버리면 대한민국 주민등록증 반납할 거예요."
진병기 기자 jin@n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