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4월 28일 내일신문 진병기·강경흠 기자의 기사 입니다. 기사 저작권은 내일신문에 있으며 무단전재, 배포, 복사를 금지합니다. 사진 일부는 일과건강에서 덧붙였습니다.


"공단에 반증책임" 판결해도 공단, 근로자에 입증 요구
반도체·자동차 등 고도 산업분야 신종 직업병 집중 발생

 

지난 7일 삼성전자 노동자들이 근로복지공단의 산재불승인 결정에 불복해 서울행정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뇌종양 등을 앓고 있는 한혜경, 이윤정, 유명화, 이희진씨 등 4명이다. '초일류기업' 삼성을 상대로 한 노동자들의 소송이 산재와 직업병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산재와 직업병 논쟁은 후진사회의 병증으로 꼽힌다.

 

1980년대 노동자 투쟁을 불러 일으켰던 요인은 바로 살인적인 저임금과 산재 문제였다. 30여년만에 다시 산재가 사회 쟁점이 된 것은 법에 부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법원은 잇따라 산재인정 판결을 내리고 있지만 소송을 통해 인정받아야 하는 노동자들은 이중고통을 겪어야 한다. 판결 실태를 통해 바로 잡혀야 할 산재법의 방향을 탐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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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주 수요일 서울 삼성 본관 앞에서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반올림)' 회원들이

삼성의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인정을 촉구하는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사진=반올림

 

속피부에 콜라겐이 달라붙으면서 몸 전체가 유리막으로 덮혀가는 '경피증'에 걸린 정 모(46)씨. 회사에서 납땜을 한 지 2년만에 몸이 망가졌는데, 산재로 인정받는 데 8년이 걸렸다. 근로복지공단은 선례가 없는 질병으로서 의학적으로도 근로환경과 상관관계가 밝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산재인정을 거부했다.

 

정씨는 대법원의 파기환송까지 받아가며 6년만에 경피증을 산재로 인정받았지만, 악화된 병세가 폐암으로 전이됐다. 근로복지공단은 또다시 폐암은 경피증과 무관하다고 외면했다. 또 소송을 걸어야 했다. 올해 초 법원이 정씨의 손을 들어주자 공단은 이번에는 항소하지 않았다. 공단 관계자는 "처음 소송 때 너무 오래 고생한 정씨에게 미안한 점도 있어 항소를 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산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들의 근로환경도 계속 달라진다. 반도체산업은 80년대에는 보기 드문 직종이었으나 지금은 이 분야에서 신종직업병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직업병이 지금 핵심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정부, 신종직업병에는 모르쇠 = 그러나 정씨의 사례에서처럼 행정기관은 신종직업병에 대해서는 '모르쇠'다. 사회보장제도인 산재보험이 "근로자의 업무상의 재해를 신속하고 공정하게 보상하며…"라는 산재법의 취지와는 달리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정씨는 법원이 뒤늦게나마 전문적인 의료진의 의견을 수용해 좋은 결과를 얻은 경우다.

 

◆신종 직업성 암 산재승인, 프랑스 영국 독일에 비해 100분의1 = 우 모(사망 당시 45)씨는 '역형성 성상세포종' 진단을 받고 투병하다가 지난해 사망했다. 뇌세포가 종양으로 변이되는 뇌암으로 톨루엔 등 유기용제에 지속적으로 노출됐을 때 발병하는 병세다. 우씨는 2000년대 이후 반도체와 함께 한국경제를 이끌어 온 자동차업체인 르노삼성자동차에서 20년간 생산직에 근무했다. 그는 생계가 막막한 두 아들과 부인에게 한푼의 산재보상금도 물려주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우씨의 작업장에서는 톨루엔 등 유기용제가 사용됐으나 매년 검사 때마다 법적 기준치보다 낮은 수치로 기록됐다. 의료진은 "유기용제는 기준치 이하라도 장기간 흡수하면 정신운동과 인지능력에 영향을 줄 수 있으나, 성상세포종과 유기용제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연구문헌을 찾기 어렵다"는 소견을 냈다. 서울행정법원의 해당 재판부는 직접적 관련성이 밝혀지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유족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신종 직업성 암'을 산재로 인정하지 않기로 유명하다. 프랑스나 영국, 독일에 비해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2007년 기준으로 프랑스가 900명의 암환자를 산재로 치료했지만, 우리나라는 7명만을 산재로 인정했다. 암 등 신종 직업병과 업무의 직접적인 관련성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게 거부사유다. 이른바 입증책임을 노동자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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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8일 근로복지공단 앞에서 '산재보험 전면개혁을 위한 민주노총 결의대회'가 열렸다. ⓒ 사진=신동준, iLabor.org 

 

◆정부 반증책임으로 법 개정해야 = 이와 관련하여 2009년말 서울고등법원 행정5부(조용구 부장판사)는 주목할 만한 판결을 내렸다. 근로복지공단이 시멘트공장에서 21년간 근무하다가 부비동(콧속)암으로 사망한 노동자에게 '업무와 암 발병과의 인과관계를 증명하지 못했다'며 유족급여를 지급하지 않은 사건에 관해서다.

 

법원은 "작업현장에서 발병원인 물질과 업무상 재해의 인과관계를 따지는 일은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필요하므로 전문가가 아닌 근로자나 유족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고, 과학기술 수준에 비추어 그 물질과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 자연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 역시 곤란한 경우가 많다"면서 "작업환경을 유해물질로부터 안전하게 배려해 줄 책무를 지닌 사업주와 국가는 기술적, 경제적으로 피해자보다 원인조사가 용이할 뿐 아니라 당해 물질의 유해성 여부를 조사할 사회적 책무를 부담한다"고 판결했던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법원은 "작업장의 특정물질이 발병원인일 가능성이 있고, 근로자가 업무수행과정에서 그 물질에 노출되면서 발병했다면 국가는 근로자가 그 물질이 아닌 다른 원인에 의해 질병에 걸렸다는 걸 입증하지 못하는 한, 산재로 인정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공단에 질병과 업무가 관련 없다는 것을 반증할 책임이 있다고 못박은 것이다. 이 판결은 지난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이런 판결에도 불구하고 공단은 여전히 근로자의 입증을 요구하면서 산재인정을 거부하고 있다. 법원도 우씨의 사건에서 보듯이 사안에 따라 판결을 달리 하기도 한다.

 

이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산재법 조항을 손질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는 "신종 직업병의 경우 먼저 산재보장을 인정하고 나중에 정산하는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선보장제도를 도입해도 추가경비부담은 5%를 넘지 않는 반면 노동자들의 고통은 획기적으로 줄어든다"고 주장했다.

 

서울행정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업무와 상당한 인과관계에 있는 경우를 인정하는 현행 법률을 고쳐 '업무와 무관하다고 입증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산재로 인정'하도록 법조항에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현재 영국이 "업무 중에 발생한 재해는 반증이 없는 한 그 업무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되어 있어 국가의 입증책임을 명문화해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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