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0 13:14
이 기사는 일과건강 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노동자 건강권 운동, 식탁 위 쇠고기처럼'의 일부 내용입니다. 필자는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교육실장 김신범 님이며 사진과 글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고맙습니다.
10년 전 열린 노건연 10주년 기념토론회. 노동자 건강권 운동의 중장기 발전 전망을 논의했다
. ⓒ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1988년 문송면 군의 수은중독 사망, 원진레이온 이황화탄소 중독증으로부터 20년이 지났다. 한국사회 노동자 건강권의 오늘은 20년과 비교해 무엇이 달라졌는지 올 한 해 내내 가슴에 담고 살아왔다. 그리고 나는 또 어떤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해왔다. 원진연구소에 들어온 지 내년이면 만 10년을 맞는다. 교육센터 실장을 맡아서 민주노총과 산하연맹·노조와의 다양한 사업을 만들어온 것도 만 5년이 되었다. 이제 이 글을 빌어서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20주년인 올해를 평가하고, 나의 10년을 평가해보고자 한다. 아무래도 이 글은 일과건강 독자 여러분들 보다는 내가 두고두고 읽을 몫이 될 것 같다. 게으른 탓에 스스로 자기정리를 못하고, 많은 동지들과 공유하는 원고를 빌어 자기반성하는 내가 참 밉다.
젊은 날 추락을 멈춰 준 단어 ‘산재’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자랐다. 대학을 다니다가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노동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실패했다. 그것이 1992년. 그 때부터 1년간은 시커먼 암흑의 바닥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던 1993년의 어느 날,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을 다니던 선배 하나가 내 인생을 걱정해주다가 불쑥 산업재해를 공부해보라고 한마디 툭 뱉었다. 그런데 그만 내 마음 속에 그 말씨가 남아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산업재해라…
중학시절이었다. 인천의 판자촌에서 함께 뛰놀던 장대같이 큰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녀석의 아버지가 산재로 돌아가시면서, 중학생이던 아들이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 대신 취직하기로 합의하였다. 중학생의 머리로도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배 말을 듣고서 얼마 후 산업재해 노동자들을 만나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국회에서 산업재해 관련한 공청회가 열린다기에 갔다가 불량스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산재노협 식구들이었다. 먼저 찾아가 인사드리고, 사무실까지 따라갔다. 따뜻한 밥도 얻어먹고 얘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내 눈을 들여다보면서, 너도 할 일이 있다고 말해주는 형들 앞에서 내 젊은 날 추락은 멈췄다. 이 날 이후, 지금 나와 결혼한 친구에게 영어공부를 시켜달라고 졸라서 중학교 영어책부터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95년 봄 보건대학원에 입학했고, 99년 원진연구소에 들어왔다. 여담이지만, 지금도 대학 동기들은 나의 졸업과 대학원진입을 기적 같은 일이라고 부른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10년 전 선배 몫 10년 뒤 나의 과제
1998년 노동과건강연구회는 10주년을 맞이하였다. 10주년 기념토론회 자료집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는 책이다. 이 책과 토론회의 토론자료(발제 김은희, 토론 주영미·박석운)를 통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정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정리된 10년 운동의 성과와 과제는 이러했다.
산재추방운동연합이 발행한 '노동과건강' 2000년 1.2월호에 실린 노동환경건강연구소 구성원 인터뷰 기사.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는 정진부, 허 용, 윤충식, 강태선(앞줄 왼쪽부터 반시계방향)
선생님들 모습이 보인다. ⓒ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
문송면 사망,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이후 건강권운동진영은 산업재해의 심각성을 폭로하고 사회 여론이 형성되도록 하였으며, 제도권에 산업안전을 담당하는 조직이 만들어지도록 하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산재추방운동의 주체적인 동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일상적인 활동으로 산재추방운동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으며, 안전보건은 활동가만의 몫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문제가 되고 있었다. 기업별노조와 대기업노조 활동이 중심이 되어 소규모 영세사업장 미조직노동자 문제는 대책이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중장기 발전전망을 만들어낼 정책역량이 부족하고, 전문기관과 운동의 분리현상이 발생한다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세분의 선배들은 토론회 자리에서 노동조합 내 안전보건활동이 정착되고 활성화되기 위하여 노동조합 상급연맹이 안전보건활동을 할 수 있는 조직과 담당자를 마련해야 하며, 미조직노동자 중소사업장 노동자의 안전보건 문제를 제기할 주체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하였다. 원진연구소와 같은 전문기관이 설립되어야 하며, 전국차원의 노동자건강권 투쟁단체가 건설되어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1998년에 이러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1999년 녹색병원과 연구소가 만들어졌다. 산재추방운동연합이 건설되었다. 그것은 나의 몫이 아니라 선배님들의 몫이었다. 1999년 원진연구소에 창립멤버로 들어간 나는 당연히 노동조합이 주체가 되는 안전보건활동이 내 평생의 숙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2000년부터 일상 활동 강화를 위한 안전보건 분야의 역할을 고민하였고, 교안을 작성하여 나누기 시작하였다. 노동조합 상급조직 강화를 위하여 화학섬유연맹과 함께 2004년부터 안전보건지도위원 양성사업을 추진하였다. 민주노총에서 노동안전보건위원회를 만들겠다고 확답을 받은 것도 2004년, 2006년부터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이 되어서 대중조직의 안전보건활동을 강화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해왔다. 특히 2006년 말부터 교육센터가 주도적으로 비정규노동자, 미조직노동자의 안전보건 문제를 제기하자고 다짐하였다. 그 결과 2007년부터 서비스연맹과 함께 의자캠페인을 통해 비제조업 노동자의 노안활동 영역을 개척하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덧 2008년이 되었다. 1998년 선배님들이 주신 과제를 가슴에 담고 살아온 나는 이제 다시 묻게 된 것이다. “노동자 건강권을 위하여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모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위해 조직하라
지난 10년 내 가슴속에 희망처럼 떠올라서 이제는 마음을 묵직하게 짓누르는 슬로건이 있다. “모든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이다. 여기서 모든 노동자란, 노동조합이 없는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외국인이주노동자, 여성노동자, 고령노동자, 장애노동자들, 그리고 더 나아가 한국보다 경제력이 낮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 노동자들이다. 슬로건은 또 있다.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위하여 조직하라”이다. 노동3권이 있을 때 건강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는 전 세계 노동자들의 깨달음이 농축된 구호이다. 나는 한국사회의 노동자건강권 운동이 이제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이 두 가지 슬로건을 기치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노동자건강권운동의 본질과 맞닿아 한국사회에 요구되는 운동과제이기 때문이다.
유해물질과 소음과 중량물과 스트레스와 노동강도… 이런 것이 노동자의 건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다. 하지만, 유해물질이 있다고 다 중독에 걸리지는 않는다. 중량물을 취급한다고 해서 다 허리가 망가지지는 않는다. 이러한 위험요인은 위험요인에 불과하다. 위험요인이 위험이 되는 데에는 다른 기제가 작용한다. 국가차원의 생명과 노동 경시풍조와 배금주의, 기업의 비인간적 노무관리와 통제문화, 노동자들의 권리주장을 위한 조직 부재 또는 어용노동조합, 노동자들 사이에 만연된 보신주의와 개인주의 같은 것이 촉매가 되어 위험요인으로부터 노동자를 질병과 사고와 사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노동자의 건강이란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할 때 파괴당하며, 스스로 노동자로서 자신의 조직을 건설하여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할 때 지켜질 수 없는 것이다. 노동자의 건강권이란 노동과 노동자에 대한 존엄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형성되는 ‘노동자의 몸과 마음’에 대한 권리인 것이다.
노동안전보건교육센터가 3년 째 진행하는 기획교육도 노동자들이 노안활동에 전망을 갖도록 하는 노력 중 하나다. ⓒ 이현정
임기 마치면 지역활동 전망 가질 수 있어야
1960년대 개발독재는 국민의 몸을 팔아 돈을 벌고자 하였다. 베트남전쟁에 청춘이 팔려갔다. 노동은 힘든 것이며, 돈을 벌기 위해 나의 가족이나 몸을 희생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지배하였다. 억눌렸던 민중이 87년 대투쟁으로 새로운 삶의 기회를 찾아 나섰다. 하지만 민주노조를 세우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떳떳해진 것은 모든 노동자가 아니라 일부 노동자의 얘기였다. 그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모든 노동자가 그렇데 되어야 할 뿐 아닌가? 다만 스스로의 울타리에만 갇혀서 나만 살자고 버티는 노동자들이 있다면 욕을 좀 먹어도 싸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박차고 나와서 모두가 잘 살고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현장에 이상한 관행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많은 노동안전보건활동가들이 자신의 집행부 임기가 끝나면 활동을 접는다. 수많은 노안활동가들이 육성되었지만, 울타리를 넘어 주변의 노동조합 없는 노동자들 문제에 관심 갖지 못하고 소속사업장 활동만 하다가 주저앉고 있다. 그것이 정상인줄 착각한다. 하지만 각 사업장의 활동가들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민주노총을 비롯해 상급조직들이 노안활동가들에게 장기간 활동해야겠다는 욕심을 만들어주지 않았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20년 전, 10년 전 훌륭한 전문가들도 있었고, 현장에는 사명감에 불타는 노안활동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있지 않았다. 지역교류를 하였고, 지역에 단체를 설립하여 회원이 되고 강사가 되었었다. 우리 노동자건강권 운동이 그러한 활동가들의 활동이 보장되는 체계, 전망을 서로 공유하고 “모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삶의 참 맛을 나누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덧 후배들은 그러한 전망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어 버린 것으로 봐야 옳다. 사업장의 숙련된 노안활동가에게 집행부 임기가 끝나거든 지역에서 한 번 일해 볼 생각 없냐고 물어보는 구조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상급조직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이라고 생각한다.
민주노총 이름으로, 금속노조 이름으로 임명한, 또는 그것도 아니라면 모든 노동자의 이름으로 임명한 노동자들의 산별과 지역 안전보건대표자가 존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그 중에서 비정규직에 꼽힌 동지가 만들어지고, 미조직노동자 문제에 꼽힌 동지도 만들어지고, 여성에 꼽힌, 이주노동에 꼽힌 동지들이 줄줄이 나와 줘서 활동 영역이 울타리 없이 이루어지지 않겠는가. 사람이 울타리를 만들고 사람이 울타리를 부순다. 울타리를 부술 사람을 만드는 것, 그리고 그러한 활동이 노동자건강권 운동의 주류가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이제부터 10년의 과제라고 나는 본다.
2008년의 태양이 다시 또 새로운 시대를 향해 저물고 있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슬프지 않고 힘들지 않으며, 주눅 들지도 않았다. 모든 동지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 10년 또 신나게 한 번 달려보자고 외친다. 우리 모두 파이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