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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일과건강 2007년 9월호




몇 년 전만 해도 특정 공단 지역이나 거주 지역이 아니면 보기 힘들었던 이주노동자들을 이제는 거리, 버스, 지하철 어느 곳에서든 쉽게 만난다. 그리고 그들은 확실히 대한민국 생산현장에서 이제 빠질 수 없는 노동력이 되었다. 물론 고국보다 ‘높은’ 보수를 받아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생계와 자신의 미래를 좀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이 나라에 온 그들이 정말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 지는 여전히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회문제’이고 산업재해로 들어가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진다. 

중국 길림에서 온 조선족 김영대 씨도 좀 더 벌어보자는 생각에 산업연수생으로 1996년 10월 17일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한국에 나갔다 들어온 친구들이 집을 사는 모습에 “한 3년 고생하자.”고 마음을 다지고 당시 중국 돈으로 6만4천원(한화 약 8백만 원)을 송출업체에 내고 반월공단에 있는 한 염색공장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가 길림에서 보고 생각했던 ‘한국’은 없었다. 주야간 2교대 근무였던 그곳에서 첫 해 받은 월급은 60~64만원 사이였고 1년이 지나서는 특근과 잔업을 해야 80만 원 정도를 만질 수 있었다. 그 돈으로 한국에 올 때 낸 빚도 갚고 아이들도 가르치고 본인의 한국생활도 책임져야 했다. 1997년, 그가 온 이듬해 터진 IMF로 환율이 급등하면서 그가 중국으로 송금한 돈의 가치도 함께 하락했다. 2년 기한에 1년 연장만이 가능했던 그때, 3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김영대 씨는 고민했다. “이러고 집에 가면 도저히 답이 안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불법체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김영대 씨가 다녔던 염생공장은 불법체류자를 쓰지 않아 그는 돈 벌러 왔는데, 돈을 못 벌어 사정이 어렵다는 얘기를 회사에 하고 한국에서의 첫 직장을 나왔다. 딱히 인맥이 없었던 그는 공단에 인력을 소개하는 용역업체를 통해 기모회사에 3개월 정도 다니다 용접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한국 분들이 일만 열심히 해주면 인정을 해주는” 분위기에서 용접기술을 배우게 되었는데, 문제는 출장이었다. 불법체류자 신분이었던 그로서는 출장을 나가는 것은 위험 그 자체였다. 
마침 동갑내기인 한국친구의 소개로 2001년 4월에 콘테이너 제작업체에 잡부로 들어간다. ‘타국에서의 삶’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졌던 외국에서 일을 해 본 용접기술자들과 사이좋게 지내면서 3개월 동안 열심히 일을 배웠다. 그리고 그해 겨울이었다.

날씨가 추워 손도 녹이고 용접모에 생기는 성에도 제거하는 용으로 화로를 피워 두는데, 일을 마친 용접공들과 다른 직원들은 불을 쬐고 있었고 마무리할 일이 남았던 그는 작업복과 용접모, 장갑 등을 낀 채 몸을 녹였다. 그가 일을 하기 위해 작업장 쪽으로 몸을 돌리려던 순간, 정말 순식간에 사고가 일어났다. 
불을 더 지피려던 젊은 페인트공이 화로에 나무를 넣고 잘 타라고 신나를 부은 것이 화근이었다. 불길이 신나통으로 들어갔다 그를 향해 뿜어져 나온 것이다. 김영대 씨는 “나는 누가 나를 미는 줄 알았다.”며 “열기가 확 들어오는 게 느껴지면서 ‘이거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땅 바닥을 굴렀고, 불이 붙은 나를 보고 소화기를 들고 달려온 작업자 덕에 목숨을 건졌다.”며 상상하기도 싫었을 당시를 회상했다. 119가 와서 물을 붓는 순간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119가 처음 도착했던 시화병원에서 환자 상태를 보고는 바로 한강성심병원으로 옮겼을 정도로 그의 화상 정도는 매우 심각했다. 겨울 작업복을 입었던 데다 장갑, 용접모까지 착용하고 있어 화기가 밖으로 빠지지 않고 안에 머물렀던 탓도 컸다. 
결국 그는 신체 60%에 화상을 입었고 이 때문에 요도협착, 양측 만성 중이염, 우측 다발성 수지절단, 양측 비골신경 손상, 담즙 역류성 위염, 역류성 식도염, 우측 서혜부 탈장, 양측성 감각신경성 난청 등의 질환을 가진 산업재해자가 되었다. 
“산 것만도 다행”이라는 의사의 말처럼 화상 초기에 그는 ‘살아 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진통제로 통증을 잊었던 첫 20일의 시간을 제외하면 수십 번의 피부이식 수술, 요도 확대 수술을 해야 했고 피 속으로 균이 침투하는 패혈증 등으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었다. 
딱히 간호할 사람이 없어 중국에 있던 아내가 자식 둘을 뒤로 하고 간병인으로 초정되어 한국에 왔고 꼬박 누워만 있어야 했던 8개월은 물론 2003년 병원 문을 나서고 지금까지 치료와 생계를 온전히 책임지고 있다.

일반외과와 성형외과, 비뇨기과, 재활치료를 옮겨 다니며 치료를 하며 조금씩 몸이 나아지면서 드는 걱정은 치료비였다. 산업재해로 인정받았다 해도 비급여 치료를 꽤나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산업재해 노동자에게는 휴업급여로 평균임금의 70%가 지급되기는 하지만 고임금의 노동자도 아니었던 그에게 생활과 치료를 동시에 할 수 있는 넉넉함을 주지 못했다. 

“회사가 처음에는 치료는 걱정하지 말라 했지만, 나중에는 전화도 받지 않았다.”는 그때 김영대 씨는 치료비 걱정에 우울증까지 앓았다. 비급여로 쌓인 치료비 1천7백만 원 정도를 내지 못하니 병원에서 치료비를 내라는 압력은 물론 퇴원을 요구받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처럼 2002년 인연을 맺은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와 천주교 노동사목회 산재사목과의 만남은 그에게 ‘솟아날 구멍’이었다. 
산재사목과 이곳을 통해 알게 된 신부의 노력으로 치료비의 많은 부분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퇴원 후에도 그는 여전히 물리치료와 비뇨기과 등을 다니며 치료를 받는 중이며 지금도 매월 40만 원 정도를 비급여 치료비로 부담한다.
“화상환자는 여름은 더워서 못 살고 겨울은 추워서 못 산다.”는 그는 “피부가 없는 3도 화상의 환자들은 여름에는 땀이 나오지 않는 고통을 겨울에는 오그라드는 고통을 느끼고 밤이면 저려와 잠을 못 잔다.”며 어느 한철도 편하지 않은 몸 상태를 설명했다. 화상으로 피부와 인대, 근육이 붙어버렸기 때문이란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힘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바로 ‘화상환자의 비급여 문제’와 ‘화상 정도에 따른 적절한 산재장애등급’이라고 말했다. 화상치료에 쓰이는 인공피부 한 장에 백만 원이 넘지만 비급여라 치료비용을 온전히 산재환자가 부담해야 하는데, 김영대 씨처럼 몸의 60%에 3도 화상을 입으면 그 치료비는 상상을 초월한다. 
화상에 따른 산재장애등급 역시 화상부위와 상태보다는 화상으로 인한 신체절단이나 신경손상 유무만을 가지고 따지다보니 본인이 실제 장애와 거리가 있다고 한다. 치료 후에 오는 몸과 마음의 고통이나 합병증도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 화상은 ‘완치가 없다’고 한다. 화상부위가 아물어도 또 다른 신체 고통이 뒤따르고 무엇보다 화상환자를 바라보는 차가운 사회 시선이 그들에게는 두 번째, 세 번째 고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김영대 씨를 만난 날 그가 병원에서 알게 된 또 다른 화상환자를 만났다. 35도가 넘는 날씨에도 긴팔과 장갑, 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에서 화상환자가 겪는 신체, 정신, 사회적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최저임금을 받더라도 일을 할 수 없게 된 김영대 씨는 몸이 좀 더 좋아지면 봉사활동을 하려고 한다. 병원에 있을 때 받은 도움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3년만 고생하자며 한국 땅을 밟았던 그는 치료문제와 합병증 염려로 귀화를 신청했고 이제 마지막 절차만을 남겨 둔 상태이다. ‘코리아 드림’을 꿈꾸던 산업연수생, 불법체류 이주노동자에서 이제 한국인이 될 그에게 대한민국이 어떤 모습으로라도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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