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건설노조 노동안전보건국장 김행곤, 일과건강 2007년 7,8월호
2007년 산재피해자 증언대회에서 발언하는 이재빈 동지
2006년 3월 7일 오전. 한통의 전화가 와서 상담을 요청하였다. 그 사람은 바로 건설현장에서 비계공으로 약 20년간 일하다 폐암3기 판정을 받고 치료 중에 있는 이재빈 동지였다.
드디어 터질 것이 터졌구나!”
노동조합이 생기기 전에는 현장에 석면포가 널려있었기에 폐암 잠복기를 생각하면 이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비계공에 대한 폐암 산재승인 사례가 없어 여수 국가산단의 현장사진, 근무기록들을 증거자료로 확보하여 근로복지공단에 요양신청서를 제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건설현장의 노동자가 직업병에 걸리면 가장 힘든 서류 중에 하나가 그 사람이 어느 현장에 근무했는지를 증명하는 일이다. 4대 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고, 한 달이면 현장이 3~4곳이 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이고, 급여도 봉투로 주었기 때문에 급여봉투가 없다면 근무상황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건설현장에서 20여년 일을 했고, 작업동료도 있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의 인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직되지 않은 지역은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2006년 6월 7일, 요양신청서 근로복지공단에 접수하면서 역학조사를 하지도 않고 불승인을 내린다면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후의 사태는 공단에 책임이 있다는 우리의 의사를 전달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7월 4일 접수한 정○○(용접) 씨는 12월 달에 산재승인이 되었는데 이재빈 동지는 소식이 없어 본인도 답답한지 자주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기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산재승인을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고 생각했기에 승인만 된다면 좀 늦어져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기다리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2007년 2월 26일부터 분회별로 돌아가면서 퇴근 후 집회를 열고 천막농성에 들어가기로 운영위원회를 통하여 결정하였다. 비계분회를 시작으로 3월 9일 탱크분회가 마지막으로 집회와 천막농성을 벌였다. 작년에 백혈병 산재승인 쟁취할 때 한번 해봤다고 조합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성숙해졌구나하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조합원들이 집회를 통해서 직업병은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본인도 현재 진행 중일수도 있다는 인식이 각인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즉 건설현장에 20~30년 일을 했다면 누구나 예외일수 없다는 생각을 조합원들이 갖게 되면서 서로의 동지애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또한 집회를 계기로 폐암환자 4명이 조합에 상담을 요청해와 3명이 접수하기로 하고 1명은 추후에 결정해서 알려주기로 했다.
3월 15일에는 인천에 있는 산업안전관리공단 앞에 집회신고도 내고 4월 4일은 여수에서 노동자건강권과 확보와 이재빈 동지 산재승인 촉구 결의대회도 열었지만 근로복지공단의 답은 없었다.
5월 25일. 역학조사 결과가 여수지사에 내려왔다는 연락을 받고 기쁨 반, 설렘 반, 우려 반, 공단에 찾아갔다. 그러나 평가위원들이 결정하기가 힘들어 6대7로 불승인 쪽으로 결정되어 서류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가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긴급 운영위원회 회의에서 5월 30일 오후 3시에 전 조합원을 근로복지공단 여수지사로 집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전에 언론에 알리고자 29일 점거를 결정하고 지사장실에 들어갔다. 밤 9시까지의 면담과정에서 경찰서, 노동부 지청장이 지사장을 면담하였고, 지사장은 “좋은 방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약속해 근로복지공단 복도에서 밤을 지새웠다.
30일 아침, 근로복지공단 안에서 실천단 20명과 함께 농성을 시작하였다. 공단 밖으로 나가지 않기 위해 근로복지공단 안에서 초라한 자장면으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결과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오후 3시가 되어도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조합원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하였으며, 근로복지공단 주위는 전경 1천여 명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 상황에 우리는 실천단 20명과 함께 불승인될 시 점거에 들어가기로 결의를 다졌다. 어떻게 알았는지 3시 30분이 되자 전경들이 공단 앞으로 대오가 들어와 에워싸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 실천단 2명, 이재빈 동지와 함께 남아 결과를 듣고 나가기로 하고 나머지 대원들은 집회 시 대오정리를 위해 밖으로 보내기로 결정, 전경사이를 뚫고 조합원들이 모여 있는 대오로 보냈다.
오후 4시경 밖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면서 집회가 진행되었다. 바로 그때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나를 불렀다. 이재빈 동지, 실천단 2명과 함께 갔다. 그 자리에는 지사장, 보상부장이 있었다. 자리에 앉아 지사장이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었다. 불승인이다. 눈앞이 캄캄했다. 바로 고개를 돌려 이재빈 동지를 보았는데 이재빈동지의 눈가에는 벌써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너무나 허무하고 허탈했다.
사람의 생사를 쪽수로 결정해 한 가정을 파탄으로 빠지게 만들 수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을 것이다. 건설노동자들은 산재승인 되면 그나마 치료를 할 수 있고, 불승인되면 가정은 산산조각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일을 그만두면 살길이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폐암에 걸려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조합에 찾아온다고 한 조합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산재신청을 하면 그날부터 현장에 다닐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접수되어 승인까지 1년이 걸려도 그나마 승인이 되면 좋지만 불승인으로 결정되면 차라리 접수하지 않고 “1년 동안 현장에서 일을 하는 것이 낫겠구나.”라는 얄팍한 생각마저 든다.
정말 현장 건설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하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세상에선 나의 이런 얄팍한 생각이 절대 통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