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일과건강 2007년 4월호
엄격히 따지면 그에게는 두 손이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양 손의 손가락이 없다고 해야겠다. 두 번의 프레스 사고로 손가락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왼손의 두 개 정도이다. 그리고 사고는 10년의 청춘을 바친 공장을 떠나게 했다. 87년에 일어난 첫 사고 역시 큰일이었지만, 92년의 두 번째 재해로 그는 방황도 많이 했고 그의 방황은 아내를 힘들게 했다.
“지금은 ‘그 때 왜 그랬을까?’ 하지만 그 때는 정말 어휴…”하며 이어지는 산재노동자 한영철 씨의 아내 정영애 씨의 가벼운 한숨은 힘들었던 날을 잠시 되살리는 그 무엇이었다.
산재노동자 한영철 씨.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 회원이면서 우편발송 업무를 하는 자활공동체에서 일한다. 지금은 아내에게, 아들에게, 태어날 아기에게 그리고 교통사고로 먼저 세상을 떠 가슴에 묻은 딸에게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책임과 역할을 다하는 가장이지만 살짝 들쳐본 그의 과거는 소설로 쓰면 몇 권은 쓸 수 있었다.
요즘은 디지털단지라고 불리는 ‘구로1공단, 산업수출단지’에서 자동차 스테레오 외피를 만드는 공장에 다녔던 한영철 씨는 처음 접하는 프레스 기계의 ‘꽝꽝’ 대는 굉음이 무섭기도 했단다. 하지만 기계를 빨리 잡으려고 남들보다 1시간씩 일찍 출퇴근하면서 일을 배웠고, 새벽근무, 주말 철야 등 한 달 잔업시간이 170시간이 넘도록 일을 했다. 자기 라인에서 잔업이 없으면 다른 부서에 가서 잔업을 달라고 할 정도였다. 일당 5천 원 하던 시절에 그렇게 일해서 받았던 월급은 한 달 33만원~34만원. 여기서 30만원을 저축하며 미래를 꿈꾸었다.
1990년 11월에 만난 아내와는 결혼식도 못 올리고 이듬해부터 살림을 시작했다. 부모 없이 자란 점과 첫 번째 사고로 생긴 장애로 아내 집에서 반대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식은 한영철 씨가 MBC 라디오 여성시대 손숙․김승현 시절, 무료로 결혼식을 해주는 행사에 응모한 사연이 당첨돼 1996년, 제주도에서 늦깎이 결혼식을 올렸다. 가정을 꾸리고 첫 아들 진국이도 낳으면서 “행복이 이런 거구나…”할 때 두 번째 사고가 일어났다. 자동 프레스 기계의 재료를 교체하다 손이 딸려간 것이다. 자기 담당 기계가 아니었던 데다 안전장치는 앞에만 있고 작업은 양 옆에서 했기 때문에 형식적인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실의와 충격은 방황으로 이어졌다.
병원에 있을 때는 옥상에 몇 번이고 올라가 자살을 생각했고 나와서는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 해 노름에 손을 댔다.
“병원에서야 다 같이 산재환자라 눈치 안 보고 지냈는데 퇴원했더니 느낌이 완전히 달랐어요. 내 손이 그래선지 사람들 시선이 느껴지고 직장도 잡히지 않았지. 어떻게든 처자식은 먹여 살려야 하는데 말이야.”
“한 달에 심하면 열흘 정도만 집에 오고 내 나가 있는 거야. 가정을 가졌는데 외박을 그렇게 하더라고. 그때는 정말, 아휴~~, 진국이 보고 살았지.”하는 아내 말에 “그때는 그렇게라도 안 하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손만 보면 다 거절했으니까.”라며 한영철 씨가 말을 받는다.
아내는 그러면서도 “손이 없는 상태에서 살아온 것 보면 정말 대단하지. 방황하던 시절에 그래도 무슨 일을 해서라도 돈은 조금씩 벌어오더라고. 생활력은 강했지. 사실 이 사람이 손 내놓고 다닐 때 처음에는 속으로 “손 좀 넣고 다니지” 한 적도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랬나 싶어.” 한다. 한영철 씨는 애당초 다친 손을 가리거나 하지 않았다고 한다. 덕분에 아들도 아버지의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아는 형이 석유가게를 열어 겨울에는 석유배달, 여름에는 얼음배달을 했는데 처음 오토바이를 타기까지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두 손이 멀쩡해도 힘들고 무거운 배달이라 고생도 많았다. 이후 생활을 위해 우유배달, 신문배달 등을 하다 산업재해노동자협의회가 무상으로 하던 발송업무를 유료로 바꾸고 일감이 늘면서 지금은 자활공동체 일만 한다.
산업재해와 관련해서 옛날과 지금, 비교되는 것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그 때는 강제종결이란 게 없었지. 의사 소견이 있으면 요양연기도 지금처럼 어렵지 않았고.”라며 재취업 얘기를 이어갔다. 당시 일을 구하려고 장애인고용촉진공단도 가보고 일산의 직업훈련원도 가봤는데 공단은 자기 장애에 맞는 일이 없었고 훈련원은 나이제한 때문에 못 갔다. 산업재해를 당한 노동자를 배려한 정책이 부족하단 얘기다.
한영철, 정영애 부부는 자신들이 경험했던 고통을 현재의 또 다른 산재노동자와 그 가족들과 나눈다. 그는 산재노협의 병원 방문을 통해 아내는 천주교 산재사목회 활동으로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동등한 입장에서 과거에 겪었던 그 시절 얘기를 많이 해주기 때문에 산재노동자들에게 쉽게 다가간다. 자신이 다쳐 병원에 있을 때는 이렇게 위로를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정영애 씨는 “환자도 힘들지만 보호자도 힘들다.”며 보호자 입장에서 가족들을 만난다.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라 아무래도 공감대 형성이 수월한 것이다.
이들 부부 얘기를 들으며 다시 한 번 우리나라 산재보험제도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다. 요양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고통보다 자살을 선택하는 노동자가 늘어나고 여전히 산재노동자의 재취업이나 원직장 복귀는 꿈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근로복지공단 직원이, 노동부 관계자가, 사업주가 단 며칠이라도 산재노동자 가족이 되어 그들 곁에 있어 본다면 지금과 같은 정책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이 아빠처럼 힘들고 가난한 약자 편에 서서 도와주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는 정영애 씨는 오는 7월이면 셋째를 낳는다. 두 사람 다 둘째를 잃고 많이 힘들었고 나이도 있어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쁨이 앞선다고 한다. 힘들었던 시절을 이제는 편하게 되돌아 볼 수 있는 과거로 얘기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가족이 태어날 즈음, 다시 한 번 더 방문해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해 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