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승무원 해고자 아내 정인용, 일과건강 2007년 4월호
남편은 비행기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승무원입니다.
연년생으로 낳은 두 딸아이가 여섯 살, 다섯 살이 되었는데, 저희 아이들은 아빠가 승무원인줄 모릅니다. 아빠가 집을 나서며 투쟁조끼를 챙기면 ‘아빠! 민주노조 하러가?’ 하면서 한 팔을 힘차게 휘두릅니다.
둘째 아이가 태어나던 해인 2003년, 남편은 본사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아이를 낳고 병원에 누워있는데, 함께 대기발령을 받은 동료 분들이 작은 꽃바구니를 선물로 갖고 오셨습니다. 그 바구니 리본엔 ‘축, 공주님 탄생’과 함께 ‘OS그룹’이라고 씌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해고되기 전 수순을 밟는 스케줄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아이를 막 낳은 저에게 남편은 그런 얘기까지 차마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2005년 10월에 해고가 되기 전까지 자택대기를 했습니다. 스케줄상 자택대기이지 이는 자택구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회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아침 8시 반부터 5시 반까지는 집에서 대기하셔야 합니다. 이를 어길시 불이익이 생기실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 친절하기도 하시지. 미리 귀띔을 해주시는 건지, 협박을 하는 건지…
두 돌, 한 돌을 겨우 지난 아이들을 업고, 안고, 어르며 재우다 함께 지쳐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밥을 짓다가도 그저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릴 만큼 힘이 들어도, 남편에게 힘든 내색을 할 수 없다는 게 더 고역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비행을 안 시키고, 그로 인해 동료들과도 소원해지고, 또 해고로 법정투쟁에 일인시위에, 소식지 배포작업에,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으로 더 힘들고 바쁜 남편의 모습을 보고, 힘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나 힘들다”는 얘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둘째 녀석이 요즘엔 발레를 배우고 싶다고 말합니다. 억지로 떼를 쓰진 않지만, 못 보낸다고 말할 때면 마음이 짠합니다. 요샌 네 살이면 다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저희 아이들은 한 번도 가보질 못했습니다. 아빠의 특별한 교육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계부를 쓰는 엄마 입장에서는 월급 받는 해고자의 미래가 너무나도 불안하고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해고는 비단 저희 네 식구의 고통만은 아니었습니다. 맏아들이며, 맏사위로 양가 어른들의 기대감을 안고 살던 그가 해고되자, 어르신들의 충격은 너무나도 크셨고, 형제들도 힘겨워하는 형과 언니를 보며 마음아파 합니다.
무엇보다 저희 친정어머니의 걱정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전교조로 5년간 해고자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 때문에 중고등학생인 삼남매를 힘겹게 키워야 하는 고통을 겪으셨기에, 해고의 고통, 해고자 가족들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몸소 느끼셨기에, 힘들어하는 딸 생각에, 힘겨워할 사위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으셨습니다.
위염, 역류성 식도염, 게다가 눈까지 각막궤양이라는 스트레스로 인한 저의 병명들이 이제는 친숙하기까지 합니다. 남편이 대기발령을 받으면서 나기 시작한 흰 머리카락은 서른넷의 제 나이를 의심하게 만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정말 힘들고 고된 나날들이었습니다. 해고되기 전 대기발령을 받았을 때에도, 해고되어서도, 법정투쟁에서 승리하고도 대한항공의 억지에 복직발령을 받지 못한 지금도. 하지만, 저는 남편이 무엇을 위해 투쟁하는지 알기에 힘들어도 꿋꿋이 이겨낼 것이며, 저희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명품 승무원 유니폼은 못 보여줘도, 투쟁조끼와 빨간 머리띠를 두른 모습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이들로 키울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저의 남편 대한항공 37기 승무원 김태수와 함께 해주시는 모든 동료, 선후배님들께 감사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 이 땅의 해고자분들이 정든 일터로 원직복직하는 그날까지 저와 여러분들의 가족들은 제일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 드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