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탄가루 섞인 가래와 보상

2012.03.04 18:20

조회 수:7142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매일노동뉴스 노동안전보건섹션에 전문가 칼럼을 제공합니다. 본 칼럼은 2011년 3월 14일(월)에 게재됐습니다. 기사 내용과 사진은 상업용으로 이용하실 수 없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진폐환자 3명이 숨을 거뒀다. 사망한 분을 떠올리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사망한 진폐환자 중 한 사람은 비교적 젊은 60대 중반이었다. 젊어서부터 약 20년간 영월에서 광부생활을 했다. 지난 90년 광산합리화 조치로 본의 아니게 광산 일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춘천에서 조그만 슈퍼마켓을 열었다.


나이가 젊어 기운이 넘칠 때는 기침과 가래가 끊이지 않아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원 한번 가지 않았다. 그러다 기운이 떨어지자 계단을 오를 때 숨이 찼다. 숨이 차서 쌀가마니 하나조차 자전거로 배달하기 힘들어졌을 때야 병원을 찾았다. 그때가 2006년 4월이었다.


확인한 폐사진에서 진폐증은 심하지 않았다. 대신 폐섬유화증은 매우 진행된 상태였다. 근로복지공단에 신청해 진폐 정밀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보상은 받을 수 있었다. 폐섬유화증은 치료에도 큰 반응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환자는 진행 속도가 빨랐다. 장기간 입원치료에도 호전되지 않았고 끝내 사망했다. 환자는 진폐요양으로 판정받아 치료비 일체와 유족 보상금을 받았다. 남겨진 가족들에게 다른 희망을 주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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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 11월, 생계비 확보를 요구하며 집회를 열고있는 재가진폐환자들. ⓒ 이현정, 일과건강





많은 진폐환자들이 이를 부러워한다. 그들은 진폐증으로 보상이 나오고 치료비 부담 없이 치료를 받고 세상을 떠날 때 가족들에게 선물을 남기고 가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더 부러워한다. 쉽지 않은 이유는 진폐증 보상 절차에 여러 가지 걸림돌이 있기 때문이다. 걸림돌이 학문적으로는 당연할 줄 모르나,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환자들에겐 당연한 일이 아니다.


진폐증으로 보상 받으려면 폐사진에서 아스팔트위에 뿌려진 밀가루 모양의 원형 결절들이 다수 관찰돼야 한다. 이 기준은 세계적인 공통기준이다. 원형의 하얀 점(결절)은 폐로 흡입된 가루나 먼지가 아니라 우리 몸에서 벌어진 면역반응의 결과다.


면역반응은 체질마다 다르다. 봄철 꽃가루에 심한 기침·콧물·눈 가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다. 또 폐로 흡입된 가루나 먼지에 심한 면역반응이 일어나 폐사진이 모두 하얀 점(결절)으로 뒤덮인 경우가 있는 반면, 전혀 일어나지 않아 정상인의 폐사진과 유사한 경우도 있다.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하얀 점(결절)이 없더라도 폐에 쌓인 가루나 먼지 탓에 생기는 기침·가래·호흡곤란 등의 증상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할 수 있다. 하지만 타고난 체질로 이들은 어떠한 보상과 혜택을 받지 못한다. 짧은 경험으로 헤아려 본 그 수는 10명 중 2~3명 정도다.


보상대상을 결정할 때는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그런데 매일 보상에서 제외된 진폐환자들을 만나 그들의 노여움을 듣고 법 기준을 납득시키려 애쓰다 보니 보상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준이라는 잣대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광산 일을 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을 들을 때 더 그렇다. 나이가 들어도 나아지지 않은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할 때 더 그렇다. 일을 안 한 지 20년이 훌쩍 넘었어도 탄가루 섞인 가래를 뱉는 그들을 볼 때마다 더 그렇다.


이젠 보상과 보장에 있어 기준이 없기를 바란다. 퇴직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에 대한 책임은 누가 뭐래도 자본에 있다. 진폐 환자들이 마음의 짐은 덜고 가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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