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4 18:18
2011년 3월 7일 미디어충청에 기고된 김민호 노무사의 기사 입니다. 기사 저작권은 미디어충청에 있으며 정보공유라이선스2.0:영리금지를 따릅니다. 사진은 일과건강에서 덧붙였습니다.
2010년 겨울 왼쪽 눈을 안대로 가린 작업복 차림의 한 남성(이하 ‘그’ 또는 ‘재해자’)이 찾아왔다. 그는 11년간 선반기계로 금속을 가공하는 일을 하면서 두 눈에 쇳가루가 들어가는 사고(이하 ‘안구사고’)를 수차례 겪었데, 매번 공상으로 치료를 받으면서 별 문제없이 잘 근무해 왔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각막을 뚫고 들어가 오래 잔류해 있던 쇳조각이 원인이 되어 최근 왼쪽 눈이 실명된 상태였다.
한 쪽 눈을 잃고 나서 근로복지공단에 최초요양신청서를 접수한 그는, 근로복지공단이 수차례 안구사고는 인정하면서도 재해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불승인을 통보해 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수차례 안구사고 있었지만 재해경위 불분명해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재해자의 최초요양신청에 관한 사건기록일체를 검토해 보았다. 검토결과 어처구니없게도 불승인 사유는 바로 재해자가 수차례에 걸쳐 안구사고를 당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었다.
그동안 수차례의 안구사고로 안과치료를 받은 건 사실이지만, 왼쪽 눈을 실명에 이르게 한 쇳조각이 과거에 발생한 안구사고로 눈 속에 박힌 것인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만일 과거 안구사고 당시 눈 속에 박힌 것이라면 왼쪽 눈의 진료기록이 남아 있어야 하는데 모두 오른쪽 눈의 진료기록만 남아있어서 과거에 발생한 안구사고 때문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설령 과거 안구사고 때문으로 보더라도, 왼쪽 눈을 실명에 이르게 한 쇳조각이 과거 수차례의 안구사고 중 언제 적 안구사고 때 각막을 뚫고 들어간 것인지도 알 수가 없으므로, 역시 재해경위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차례 안구사고가 있었던 건 맞지만 재해경위가 불분명해 산재로는 인정할 순 없다는 것이다.
ⓒ 사진=theinjurylawyers.co.uk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일반원칙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가장 기초적인 법리는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는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질병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대법원 2005. 11. 10. 선고 2005두8009 판결 등 다수)”는 것이다.
즉,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입증책임의 정도를 완화하여 여러 가지 간접사실(제반사정)에 의한 요건사실(인과관계)의 입증을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간접사실(제반사정)에 의한 요건사실(인과관계)의 입증
첫째, 재해자가 수행한 선반작업의 '일반적 특성' 및 '안구사고'의 위험요소
재해자가 지난 11년간 수행한 선반가공은 일반적으로 쇳조각·쇳밥·쇳가루 등이 다량으로 발생하기 때문에 이러한 금속성이물질이 눈에 들어가는 안구사고의 위험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는 작업이었다.
특히 재해발생사업장은 전체 직원 10명 규모(현장작업자는 5명)로 <산업안전보건법>상 ‘안전관리자’를 선임할 법률상 의무도, 그럴 만한 여력도 없는 영세사업장이었다. 그래서 사고의 위험이 더 높고, 실제로 재해자만이 아니라 현장작업자 5명 가운데 4명이 안구사고로 안과에서 치료받은 경험이 있었다.
▲ <표1. 현장 작업자들의 안구사고로 인한 안과 진료내역> ⓒ 미디어충청
둘째, 안구사고의 유형 및 특성
‘안구사고’는 금속성이물질이 ▲각막에 끼는 사고(사고①), ▲각막을 뚫고 들어가 안구 속에 박히는 사고(사고②), ▲이 두 사고가 동시에 발생하는 사고(사고③)가 있는데, 사고유형에 따라 그 증상·진단·증상발현시기 등에서 커다란 차이가 발생한다.
위 ‘사고①’ 경우는, 눈에 먼지가 들어간 경우처럼 금속성이물질이 안구의 각막에 끼는 사고로써, 눈을 깜박이면 이물감이 뚜렷이 느껴지고 현미경검사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당시 제거술을 시행하고 ‘각막의 이물’로 진단된다.
반면, 위 ‘사고②’ 경우는, 금속성이물질이 각막을 뚫고 들어가 안구 속에 박히는 사고로써, 순간 따끔거릴 뿐 눈을 깜박여도 별다른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다가 나중에 안구 속에 박힌 금속성이물질이 어떤 영향을 미치면서 비로소 증상이 나타기 때문에, 사고당시 현미경검사에서는 발견되지 않아서 아무런 치료나 진단이 내려지지 않다가, 나중에 증상이 나타나면서 Xray 및 CT 검사를 통해 발견되어 비로소 제거술을 시행하고 ‘안내 이물’로 진단된다.
위 ‘사고③’ 경우는, ‘각막에 낀 금속성이물질’은 현미경검사를 통해 쉽게 발견하여 제거술 시행 후 ‘각막의 이물’로 진단되지만, ‘각막을 뚫고 안구 속에 박힌 금속성 이물질’은 나중에 증상이 나타나면서 Xray 및 CT 검사를 통해 발견되어 비로소 제거술을 시행하고 ‘안내 이물’로 진단된다.
특히 위 ‘사고③’의 경우에 있어서, 위 ①과 ②의 사고가 한쪽 눈에서 동시에 발생하지 않고 양쪽 눈에서 각각 발생하는 경우, ▲‘위 사고①이 발생한 쪽의 눈’에서는 사고당시 안과에서 실시한 현미경검사를 통해 쉽게 발견하여 제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당시에 ‘각막의 이물’로 진단이 내려지지만, ▲‘위 사고②가 발생한 다른 쪽의 눈’에서는 사고당시 발견되지 않고 나중에 이상증세가 나타나면서 실시한 Xray 및 CT 검사를 통해 발견되기 때문에, 사고당시에는 아무런 진단이 내려지지 않다가 나중에 ‘안내 이물’로 진단이 내려진다.
셋째, 안과 전문의(주치의)의 의학적 소견
재해자의 좌안에서 쇳조각을 빼내는 수술을 시행한 순천향대학교병원 이○○ 교수는 다음과 같은 안구사고의 특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학적 소견을 밝혔다.
“세극등 현미경검사는 주로 눈의 앞쪽을 검사하는 것으로 눈 속 깊은 곳에 박힌 이물질을 보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눈 속 이물은 현미경검사에서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
“눈 속 이물이 균이 없고, 염증을 급성으로 유발하지 않는 경우 눈 속에 오래 큰 문제없이 잔존할 수 있다. 그러나 쇠붙이 성분이 서서히 신경조직을 손상시켜서 뒤늦게 염증을 일으키거나 녹내장을 일으킬 수 있다.”
“눈 속 이물은 눈 바깥에서 눈을 뚫고 들어가야 생긴다. 작은 이물이 빠른 속도로 눈을 뚫고 들어가면 들어간 부위가 새지 않고 저절로 막힐 수 있으며, 그 부위에 따라 증세를 못 느낄 수 있다.”
넷째, 수술로 빼낸 쇳조각의 성분분석결과
수술을 통해 쇳조각을 빼낸 재해자는 쇳조각의 크기와 모양이, 고속도공구강으로 사용하는 드릴이 선반 척에 꽉 껴서 쇠망치로 드릴 날 끝을 쳐서 빼낼 때 깨져서 튀는 드릴 날 조각과 비슷하다고 했고, 회사에서도 같은 의견이었다.
이에 한국화학융합시험연구원에 ▲‘회사에서 고속도 공구강으로 사용하는 드릴’과 ▲‘수수로 빼낸 쇳조각’에 대한 성분분석을 의뢰하였다. 그 결과 드릴에서는 C, Si, V, Cr, Fe, Mo, W의 성분이 검출되었고, 쉿조각에서는 C, O, Na, P, Cl, Ca, V, Cr, Fe, Mo, W의 성분이 검출되었다.
모든 고속도 공구강에는 W, Mo, Cr, V가 기본성분으로 함유되어 있는데, 드릴과 쇳조각 모두에서 기본성분이 검출되었다. 드릴에서 검출된 성분 가운데 Si를 제외한 모든 성분이 쇳조각에서도 검출되었다.
Si의 경우 0.4%이하로 미량 함유되어 있는데다 쇳조각이가 불과 1-2mm 정도로 정확한 성분분석결과를 얻기에는 너무 작기 때문에 검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연구원에서도 “의뢰자가 제시한 시료 및 시료명으로 시험한 결과로서 전체 제품에 대한 품질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고 밝히고 있다).
드릴에서 검출되지 않은 성분이 쇳조각에서는 검출된 것은, 쇳조각의 크기가 너무 작아서 세척 후 성분분석을 하면 성분분석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연구원 측의 판단에 따라 세척하지 않고 성분분석을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아마도 재해자의 안구 성분과 수술 과정에서 묻은 성분일 수도 있다.
이상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재해자의 왼쪽 눈에서 수술을 통해 빼낸 쇳조각은 회사에서 사용하는 고속도 공구강의 쇳조각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선반공에게 행한 불승인은 상당인과관계 일반원칙에 어긋나는 부당한 처분
업무상 재해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이물질이 각막을 뚫고 안구 속에 박히는 안구사고의 특성상 사고당시 재해자가 재해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수 있고, 현미경검사에서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 ▲과거 수년간 재해자에게 안구사고가 여러 차례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 원인이 된 사고일자를 특정하기가 대단히 곤란할 수밖에 없다는 점 등 ‘특수한 사정’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즉, (1) 쇳조각이 사고당시에 재해자는 물론 현미경검사를 시행한 안과전문의조차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 나중에 Xray 및 CT검사를 통해서 비로소 발견된 점, (2) 성분분석결과 쇳조각에서 회사에서 사용하는 드릴의 기본성분이 모두 검출된 점, (3) 과거 재해자에게 발생한 여러 차례의 안구사고 가운데 드릴 쇳조각이 눈에 튀는 사고가 2차례(2004. 2.경, 2009. 10. 12.) 발생한 점, (4) 재해자 외에도 동료작업들 대부분이 안구사고로 치료받은 적이 있는 점 등 제반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위 2차례(2004. 2.경, 2009. 10. 12.)의 안구 이물질 사고가 공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병하였거나, 적어도 둘 중 어느 하나의 사고가 단독 원인으로 작용하여 발병하였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할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단지 과거 수차례의 안구사고로 인한 진료기록 중 왼쪽 눈에 관한 기록은 없다는 점, 실명의 원인이 된 쇳조각이 눈에 들어간 안구사고의 발생일자를 특정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불승인 처분하였다.
그러나 이는 안고사고의 유형과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또 과거 단 1차례의 안구사고를 당한 사람은 산재로 인정되는 반면, 과거 여러 차례의 안구사고를 당한 사람은 산재로 인정받지 못하는 대단히 불합리한 결과가 초래된다. 이러한 결과는 산재법의 기본이념과 정신에 비추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위 불승인 처분은 사회통념상 합리성도 결여된 부당한 처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선반공은 불복절차(심사청구)를 거쳐 산재로 인정되었다.
선반공 사건을 통해 본 몇 가지 문제점
첫째, 업무와 재해 사이의 상당인과관계 입증책임의 문제
업무상 사고의 경우 재해발생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재해경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불승인 처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런 사례를 조사해 보면, 공단에서 현장조사는커녕 심지어 재해자나 사업주를 상대로 한 출석조사조차 생략한 채 서면조사로 대신한 뒤 서면에 기재된 내용만으로 재해경위 불분명을 이유로 불승인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선반공의 사례에서 보듯이, 재해자가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런 이유로 대법원은 입증책임의 정도를 완화하여 여러 가지 간접사실(제반사정)에 의한 요건사실(인과관계)의 입증을 허용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리는 모든 산재 판결에서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고 있으며, 특히 근로복지공단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노동자 건강권을 보다 두텁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판례 법리를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 명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 <표2. 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할 사업의 종류, 규모, 안전관리자의 수 및 선임방법> ⓒ 미디어충청
둘째, 산업안전의 사각지대와 실효성 문제
사업주는 <산업안전보건법> 제15조에 따라 사업장에 안전관리자를 두어야 하지만, 일정규모 이하의 중소영세사업장은 두지 않아도 된다. 이렇듯 노동자들의 건강권 문제와 직결되는 법 규정의 경우, 일정규모 이상의 사업장에만 적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일부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중소영세사업장에 대한 산업안전감독을 특별히 더 강화해서 실시하는 것도 아니다. 설령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나더라도 대부분 과태료 처분이나 경고에 그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런 현실은 사업주에게 <산업안전보건법>을 위반하는 것이 준수하는 것보다 유리하다는 신호로 작용한다.
정부의 산업안전감독권한은 기업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지방자치단체로 이양할 것이 아니라, 그 실질적인 실효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