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일본방문기에서 제8회 간또고신에스학습교류회 둘째날의 얘기를 하고 있었다. 계속 이어가보자. 제2분과회의 “과로성 질병의 인정, 보상, 재판투쟁의 도달점과 그 대응방법 교류”에 참여하는 중이다. 제2분과에는 대략 30명 정도가 참석하고 있다.

분과회의에서 오가는 일본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나로서는 옆 사람의 행동을 주시하면서 그들이 보는 페이지를 쫓아가기 바빴다. 회의를 시작한지 한 시간 쯤 흘렀을까. 동경도에서 온 젊은 활동가가 20분을 혼자 떠들었더니 4명 정도 잠을 잔다. 아까의 활기차던 모습이 약간 수그러들었다. 좌장과 조언자가 분위기를 띄우려고 애썼지만, 잠시 쉬기로 한다.

쉬는 시간 동안 한 여성활동가를 만났다. 자신의 재판을 위해 준비한 자료를 들고다니면서 200엔을 받고 판매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재판과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한 부 구입했다. 자료집 표지에는 이런 제목이 달려있었다. “일본에서 최초로 진행되는 본 재판을 지원해주십시오! 경견완증후군이 발생한 일본생명의 우수한 영업직원 「후루카와 유미코(布留川 由美子)의 진술서」” 그녀는 보험회사의 우수한 판매직원이었고, 여러 가방을 들고 매고 다니다가 근골격계질환에 걸렸다고 한다. 보험회사 판매직원으로서는 최초로 산재인정투쟁을 전개하고 있다는 자부심일까 아니면 무엇일까. 너무도 밝고 확신에 찬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산업재해의 피해자이건만, 피해의식에 사로잡혀서 주변을 탓하기보다는 사회의 정의를 요구하고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자부심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한국에 소개하겠다며 사진을 찍겠다고 했더니 멋진 자세를 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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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근골격계질환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서 나눠주고 있는 후루카와 유미코씨



자리에 돌아와 이것저것 자료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등록을 하면서 받은 봉투 안에는 여러 가지 자료들이 많이 들어있다. 자료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별로 발간되었던 소식지, 리플렛 등 각종 선전물들이 있다. 각자 활동하고 있는 것을 이런 방식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번 분과회의를 소개하는 자료의 맨 뒷페이지에 작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신문기사를 스크랩한 것이었는데, 이런... 바로 내 앞에 앉아있는 가족이 아닌가. 기사에 있는 한자를 읽어보니 두 딸의 어머니이자 한 남자의 아내가 과로사로 사망했다는 기사인 듯했다. 나중에 박현서 이사장님을 통해 번역해 본 기사의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고바야시 시노부씨(62세). 아내의 과로사를 산재로 인정받다.
▲ 고뱌야시 시노부씨와 두 딸이 내 바로 건너편에 앉아 있었다 /
시즈오카현 후지사와시 「석세스아카데미」 보육원의 운영부장으로 일하던 58세 여성이 2008년 10월 30일 심야에 자택의 컴퓨터 앞에서 일하다가 지주막하 출혈로 사망하였다. 3개월의 투쟁을 통해서 산재가 인정되었다. 이렇게 빨리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자택의 컴퓨터 내에 많은 파일이 있었고, 휴대전화의 메일이 증거로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집의 컴퓨터에 남겨있는 파일들이 개인 파일이 아니라 직장에 관련된 것들로 집에서도 업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증명한 것이다. 자택에서 계속되는 잔업이 과로의 원인으로 인정받았다. 집에서 수행한 잔업이 월평균 50시간 이상이었다. 회사에서 한 잔업까지 합치면 쓰러지기 전 6개월간 평균 추가노동이 월 100시간이나 되었다. 가족들도 어마어마한 양의 일을 아내와 어머니가 해왔다는 것을 알고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고인이 이렇게 많은 일을 해야했던 원인은 보육원이 민영화되면서 관리직의 업무량이 급증한 때문이다. 산재인정 기자회견에서 유가족은 “산재인정이 기쁘지만 아내는 돌아오지 않는다. 보육원은 아이들을 키우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사람을 함부로 다뤄서는 안된다. 회사가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되기를 희망한다. 자신의 직원들부터 소중하게 생각하라.”고 입장을 밝혔다.



그랬다. 예상했던 대로 이 자리에는 변호사와 의사도 있지만, 활동가들과 피해자, 그리고 그 가족들이 함께 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또 누가 있을까. 자료를 뒤적거리자 또 낯익은 얼굴이 나왔다. 내가 앉은 줄 맨 끝에서 밝게 웃으시면서 말씀을 하시던 60세 정도의 여성분이다. 그런데, 이 분은 공무원이던 아들을 잃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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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을 과로자살로 잃었지만, 슬픔을 딛고 승리한 어머니





2002년 한 노동자가 과중한 업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다가 자살하였다. 부모는 자식이 과중한 업무로 인해 자살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지방공무원재해보상기금 니이가따현 심사지부에서는 2006년에 공무재해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고인의 성격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이 심사하여 유족의 주장을 전면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2009년 1월 26일, 사고발생으로부터 6년 반이 흘러서 간신히 공무재해로 인정받았다. 이번 판결은 인과적 흐름을 인정하는 새로운 선례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판결의 중요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판결요지

업무의 과중성을 인정하여 성격적 요인을 부정하다
2000년 4월부터 11월까지 경과. 담당 업무 이외의 작업으로 인하여 자신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게다가 본인의 업무가 새로운 제도 도입으로 인하여 업무에 적응하기 위하여 4월에 120시간의 초과근로를 하였다. 이로 인한 과중한 육체적 정신적 부담이 발생하였을 것이다. 6월부터 8월 하순까지. 본인의 담당업무 외의 다른 업무인 5개년 계획을 또 담당하게 되었다. 28개 군을 다니면서 청문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문에 본인이 담당하던 업무를 미처 마무리짓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9월에는 이 때문에 100시간을 넘는 초과근로를 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자살을 일으키는 과중한 부하로 인정받았다.


알코올 의존증에 대해 부정하다
과거 판결에서는 본인의 성격 때문에 초과근로가 많았다고 보았었다. 그리고 자살 배경 중 하나로 알콜의존성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서 정신과의사의 전문감정이 이루어졌는데, 알콜의존증은 인정되지 않았다.


고강도의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인정되다. 
2002년에는 재무과 시설계에 계장을 포함한 7명 중 4명이 신입직원이었고, 그 중 한명은 결근, 또 한 명은 결원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고인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과거 판결은 통상의 업무수준이었고, 업무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업무는 장시간 초과근로를 발생시켰고, 통상업무범위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의 사유로 고강도 육체적 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등 중복된 고통으로 인하여 정신질환을 현저히 악화시켰다는 점이 인정되었다.



어느 덧 회의는 마무리 토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정확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도요타 자동차에 대한 얘기가 여러번 나오기 시작했다. 도요타는 얼마 전에도 과로사로 인해 사회적인 물의를 빚은 적 있다. 미망인이 산재신청을 해서 승소를 한 것이 2008년의 일이다. 그런데 토론하는 이들의 목소리에 힘이 빠져있는 듯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했다. 도요타 자동차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는 못하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 도요타 노동자들의 과로사를 지원하는 이들의 답답함이 오죽하겠는가. 우리도 한국타이어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얼마나 답답한가. 그런데, 일본의 활동가들은 노동조합과의 공동 활동은 거의 없을테니, 목마름과 답답함이 더욱 클 수밖에 없으리라.


우리나라의 노동자 건강권 운동은 1988년 문송면 수은중독 사망 대책투쟁,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투쟁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 때 부터 보건의료전문가와 사회의 양심적 운동세력이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한 외곽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동조합이 안전보건 운동의 주체로 서야 한다는 판단하에,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의 안전보건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함께 기울였다. 안전보건단체 활동가들이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의 안전보건담당자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노동조합의 일상활동으로서 노동안전보건활동의 의미를 적극 해석하고, 현장 활동 방안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강화해왔다. 일본의 활동가들은 한국의 이러한 모습에 대해 많은 부러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일본의 활동가들을 만나면서 한국이 갖지 못한 모습에 감동하고 부러워하게 되었다. 일본의 장점은 개개인의 자발성에 근거한 다양하고 풍부한 노력에 있다. 조직이 움직이지는 않더라도 스스로 의미를 깨닫고 자발적으로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그 모습은 활기차보였다. 사명감이 충만하면서도 딱딱하지 않은 운동 모습이 나는 너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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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들이 활동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본을 놓고, 젊은 활동가들이 없어서 대가 끊길 것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일본을 그렇게 걱정하는 것은 주제가 넘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노동자건강권 운동을 시작한 소중한 전문가 선배들은 어디에 있을까? 조선소에서 자동차회사에서 다양한 노동현장에서 “죽지 않고, 아프지 않고, 다치지 않고 일할 권리”를 외치며 일어섰던 현장의 선배들은 어디에 있을까? 사명감에 충만했으며, 보람있는 인생에 즐거워했던 우리의 선배들은 어디에 있을까? 한국의 젊음은 대가 끊긴 젊음이 아닐까? 노동자의 건강을 위해 바로 오늘 활동하고 있는 활동가는 머리가 희끗할 때까지 이 판에서 자신의 전망을 발견하고 보람을 느끼며 후배들과 함께 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최근의 나는 그렇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일본의 활동가들이 부러워하는 한국의 노동조합도 조직율이 겨우 10 %에 불과하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을 뿐이다. 민주노총에는 노동안전보건담당자가 1명 임명되어 있다. 금속노조에는 4명이 노동안전보건실에서 상근하지만, 다른 조직들은 1명이 있거나 또는 아예 없다. 일본보다는 낫지 않느냐고 위안을 하기에는 수준이 너무 낮다. 영국의 민주노총인 TUC에서는 1년에 1만명의 활동가들에게 안전보건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영국의 명예산업안전감독관들 중에는 20-30년간 안전보건활동을 한 사람들도 많고, 노동조합은 강의가 아니라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자리를 만들어서 신규활동가들이 계속 자라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다. 산별노조로서 지역의 영세사업장 노동자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챙기기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다. 그들에 비한다면 한국의 노동조합 안전보건 활동은 아주 낮은 수준에 불과하다.


물론 나는 천성적으로 낙천가이다. 비록 마음속으로 이렇게 좌절하더라도, 금방 딴 생각을 갖는다. 하루하루 앞에 놓인 일들에 묻혀있을 것이 아니라 30년 후를 바라보는 운동을 해야겠다고 금새 마음을 고쳐먹는다. 일본에서 만난 피해자들, 그들의 가족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내게 준 소중한 고민에 대해 나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할 듯하다. 기계적으로 일본을 따라하거나 영국을 따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 속에서 희망을 발견해내야 할 것이다. 일본의 길에서 만난 멋진 사람들을 보면서, 한국의 길에서 만나온 멋진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었다. 이미 나에게는 많은 것이 있다.


다음 글로 일본방문기는 마무리하고자 한다. 일본의 평화운동가들 집회에 참석한 경험, 그리고 일본의 ‘녹색병원’을 방문했던 경험을 소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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