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04 00:28
법률사무소 의연 대표, 변호사 & 산업의학전문의 박영만
최근 석면에 노출되어 숨진 근로자의 유가족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법원이 석면피해에 대한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동안 근로복지공단이 석면관련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이하 산재법)상 유족급여를 지급한 사례는 있었지만 민사상 사업주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원 모(사망 당시 46세, 여) 씨는 1976년부터 2년 동안 석면을 원료로 석면원단 등을 만드는 J사 방적부에서 근무하다 퇴직한 뒤 2004년 대학병원에서 석면 노출에 의한 악성중피종 진단을 받았다. 원 씨는 악성중피종 진단 후 오른쪽 폐를 잘라내는 등 치료를 받아오다가 결국 2006년 10월에 사망하였다. J사는 1970년경부터 일본에서 석면방직제품의 설비 및 기술을 이전받아 백석면 등을 원료로 석면사(石綿絲), 석면포, 석면테이프, 석면로프 등을 제조하였다. 원 씨는 1976년 2월 회사에 입사하여 1978년 2월에 퇴사할 때까지 회사의 백석면부 방직공장에서 정방기 작업을 담당했다. 원 씨는 1차 가공된 석면사를 정방기에서 2, 3차례 더 꼬아주는 과정에서 석면사가 끊어질 경우 이어주는 등의 작업을 하였는데, 보통 2교대로 하루 12시간씩 근무하였다.
판결문에 따르면 회사는 근로자들에게 방진마스크를 지급하였으나, 정작 방진기능을 담당하는 필터는 교체해주지 않았다. 또한 카드기, 타면기 등 다른 기계에는 기계마다 환풍기를 설치하였는데, 원 씨가 담당하던 정방기에는 석면사가 빨려 들어간다는 이유로 환풍기를 설치하지 아니하였다. 한편 작업장에는 방진 및 집진시설을 충분히 설치하지 아니하였고 천장의 몇 군데에만 환풍기를 설치하였는데, 그마저 제대로 가동하지 않아 작업현장에는 항상 석면먼지가 날아다녔다. 그리고 근로자들에게 아침조회 등의 시간을 이용하여 방진마스크와 스카프를 착용하라는 내용의 안전교육을 시행하기는 하였으나, 석면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질병이나 그에 대한 예방방법 등에 관한 구체적인 교육은 시행하지 않았다.
법원은 원 씨의 과실도 10%로 인정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근로자에게도 위험한 작업현장에서 자신의 생명, 신체 등에 미칠 위험을 피해야 할 자기안전의무와 안전작업의무가 있는데 원 씨는 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즉 원 씨가 회사에 방진마스크 필터 교체, 보호장갑 및 보호복 지급, 집진시설의 추가 설치 및 작업장의 석면먼지제거 등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지 아니한 것을 잘못으로 보았다. 민사소송은 이미 발생한 손해를 공평하게 분담시키는 것이 목표이므로 법원에서는 10%라는 상징적인 수준에서 과실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70년대에 유해작업장에 내몰린 근로자가 회사에 위와 같은 요구를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더구나 원 씨는 석면의 위험성을 제대로 몰랐을 가능성이 크고, 이는 회사 측에서 필요한 정보와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결문에서도 원 씨가 회사로부터 받은 안전장구를 착용하고 안전수칙을 지켰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원 씨의 과실을 인정한 것은 타당치 않다. 법원이 굳이 근로자의 과실을 10%로 본 것은 10% 정도면 근로자에게 크게 부당하지 않은 비율이면서, 동시에 근로자 자신에게 작업환경과 자신의 건강에 대한 주의를 촉구한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업무상질병에 걸린 근로자는 국가에 대해 산재법에 따른 보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국가는 산업재해보상보험제도를 통해 사업주로부터 징수한 보험료를 재원으로 피해근로자에게 신속하고 확실하게 재해보상을 실시한다. 산재법에 따르면 근로자의 질병이 업무와 관련해서 발생하기만 하면 근로자는 사업주의 과실에 상관없이 보상을 받을 수 있다. 한편 산재법에 따른 보상 외에 근로자는 이 사건처럼 사업주를 상대로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이 경우 근로자는 작업지시나 작업조건과 관련한 안전배려의무위반 등 사업주의 고의․과실을 증명해야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석면은 진폐증의 일종인 석면폐증 외에도 암을 일으킬 수 있다. 원 씨가 취급한 석면은 석면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유해성이 낮다는 백석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해성이 낮다고 하더라도 석면이 발암물질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석면폐증은 폐에 침입한 석면섬유가 만성적인 염증을 일으키면서 폐를 파괴하는 질병이다. 한편 석면은 폐암과 중피종(中皮腫)이라는 암을 일으키는데, 중피종은 폐를 둘러싼 얇은 막인 중피(中皮)에 발생하는 암이다. 중피종은 석면에 처음 노출된 후 30~35년 후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이 사건과 같이 불과 1~2년 정도만 석면에 노출되어도 수십 년 후 중피종이 발생할 수 있다.
현재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석면을 제조하거나 취급하는 근로자는 직업성 암을 조기에 진단하기 위해 산업안전공단에서 건강관리수첩을 발급받아 건강검진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석면 취급기간 3년 이상의 근로자에 한정되어 있으므로 원 씨 같이 노출기간이 3년 미만인 경우 건강검진도 받지 못한 채 직업성 암으로 사망할 수 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법령에 대한 정비도 필요하다. 한편 석면에 노출된 근로자가 담배를 피울 경우 단순히 석면에만 노출되는 근로자에 비해 사망률이 10배 증가하고, 폐암에 걸릴 위험은 일반 흡연자에 비해 9배 증가한다고 한다. 따라서 석면을 취급하는 근로자는 반드시 금연해야 한다.
천연광물질인 석면은 뛰어난 내화성과 절연성을 띠고 있어 건축자재나 방화재, 전기절연재 등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대구환경운동연합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최근 7년간 46명이 석면에 의한 질환(폐암 28명, 악성중피종 13명 등)으로 숨졌다고 한다. 지난 1960년대부터 석면산업이 시작되었으므로 앞으로도 석면 관련 질환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2008년부터 석면 함유량이 0.1%를 초과한 제품의 제조·사용·수입이 금지된다고는 하나, 지하철이나 학교 등 공공시설에 사용된 석면 때문에 일반 시민들은 앞으로도 계속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학교 실내공기에 석면이 0.001개/㎤(공기 10ℓ 중에 석면먼지 1개) 포함된 경우, 6년 동안 석면에 노출된 학생 100만 명당 5명에서 암이 추가로 더 발생한다고 한다.
한편 일부 지하철역의 공기 중 석면농도는 권고치를 초과했다고 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작업장의 석면노출기준은 0.1개/㎤이지만, ‘다중이용시설 등의 실내공기질 관리법’에 의하면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는 지하역사의 경우 석면농도를 0.01개/㎤로 유지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조사 결과 교대역에서는 0.011개/㎤인 곳이 1곳 있었고, 종로3가역 승강장 6곳 가운데는 4곳이 0.01개/㎤를 넘었으며 1곳은 0.014개/㎤이었다고 한다. 지하철역은 열차가 빠른 속도로 드나들기 때문에 석면이 터널을 따라 계속 확산될 수 있다. 석면에 노출되는 근로자뿐만 아니라 일반시민들에 대한 보호대책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