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병조차 유전될 지 모른다

2012.05.15 11:33

조회 수:16507

[산업의학 통신-2] 야간노동 폐지의 의학적 이유

최근에 한 자동차공장에서 열여덟살 고교 실습생이 작업도중 뇌출혈로 쓰러졌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주당 70시간에 이르는 장시간 노동과 주야 맞교대 노동을 했다. 말 그대로 ‘살인적’ 장시간 교대노동에 시달린 셈이다. 착잡한 소식을 들으며 원고를 작성하다보니 문득 목이 탄다. 갈증을 달랠 심산으로 새벽녘에 맥주 몇 캔을 사들고 나온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앳된 표정과 목소리. 그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해 감탄하는 것 중 빠지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단다. 첫 번째는 밤길이 안전하다는 것. 세상이 흉흉해 밤길 다니는 것이 예전에 비해서 많이 부담스러워졌으나 성인 남성들에게 우리나라의 밤거리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두려운 길이 아닌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는 놀라운 인터넷 환경이다. 외국에서 영화 파일을 다운받으면서 실시간으로 감상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일인지 경험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변두리 어느 허름한 모텔에서도 만나는 고속 광랜이 설치된 컴퓨터와 인터넷의 속도감은 일종의 초현실에 가까운 경험일 것이다.

 

세 번째는 24시간 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사회라는 점이다. 밤늦은 시간에 뭔가를 사고 먹고 마시기 위해서는 기껏해야 햄버거 가게를 찾는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새벽 한 두시에 나서도 물건을 사고 머리를 단장하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는 것이 늘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놀라울 따름인 것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까지는 일종의 묘한 자부심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세 번째는 어떤가? OECD 최장노동시간에 빛나는 나라의 찬란한 도시의 밤은 어떤 의미인가?

24시간 사고 먹고 마실 수 있는 사회

야간노동은 정상적인 신체의 하루주기 리듬을 교란시킨다. 인간의 하루주기리듬은 혈압, 체온, 호르몬, 심혈관계 기능 등 거의 대부분의 신체활동을 관장한다. 따라서 이러한 생체리듬의 교란이 발생한 야간교대노동자들은 위궤양, 소화불량, 변비 등 소화기 질환을 달고 살며 수면장애에 시달리기 쉽다. 야간노동이 뇌심혈관 질환 특히 심근경색이나 협심증과 같은 심혈관계 질환의 위험을 높인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기존의 고혈압, 당뇨병, 천식 등의 질환이 있는 경우 조절과 치료가 어려워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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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록 자신이 장시간노동을 경험하고 어쩔 수 없이 야간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일수록 야간노동과 장시간 노동의 일상화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불투명한 미래, 고용불안의 시대. 장시간 노동, 야간노동이 고용과 물량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일상화되고 다음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면 직업병 조차도 유전되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자료사진> 신동준


그뿐인가, 야간노동은 암 발생위험도 높인다. 스웨덴에서는 오랫동안 야간노동을 한 여성노동자들에 대해 유방암을 직업병으로 승인한 바가 있으며, 전립선암이나 대장-직장암과 야간교대노동의 관련성에 대한 연구보도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야간교대노동으로 인한 사회활동의 제약과 사회적관계의 단절 또한 부차적인 것으로 보기에는 심각한 수준의 사회적 문제로 나타난다.

 

의학적으로 명백한 사실은 이것이다. 야간교대노동 경험이 아무리 오래됐다고 하더라도 생리적으로 야간교대노동에 완전히 적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야간노동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에 미치는 악영향은 야간노동을 멈추지 않는 한 사라지지 않으며,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법 외에 건강의 악영향을 줄일 방법은 없다. 그래서 병원, 운수, 전력산업 등의 필수 공공분야와 제조공정상 생산과정이 연속적일 수밖에 없는 철강, 화학플랜트 등 극히 제한적인 부문을 제외하고는 기업의 이윤동기로 인한 야간노동은 사라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실은 필수적이지 않은 야간노동과 연장노동을 하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장시간 노동사회에 걸맞는 소비 패턴을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서비스 노동자들이 야간노동과 연장노동을 하게 되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 장시간 야간 노동이 일상화 되면서 단절된 사회적 관계의 욕구를 끊임없는 소비를 통해 해소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자신이 장시간노동을 경험하고 어쩔 수 없이 야간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일수록 야간노동과 장시간 노동의 일상화에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당신의 편의를 지켜준다는 명목으로 야간노동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당신의 야간노동 가치는 평가절하 되고 만다. 24시간 영업 사회에서 야간노동 가치는 고작 1.5배 수당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불투명한 미래, 고용불안의 시대. 장시간 노동, 야간노동이 고용과 물량 이데올로기에 파묻혀 일상화되고 다음 세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면 직업병조차 유전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생물학적 유전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간의 사회적 유전.

 

 

류현철 / 의사, 녹색병원 산업의학과장

 

 

2012년 1월 17일 <금속노동자>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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