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끔한 드레스 셔츠에 보일 듯 말 듯 한 커프스 버튼, 구두 등을 스치듯 덮는 알맞은 길이와 약간 조이는 듯한 양복바지. 이쯤 설명하면 딱 ‘차도남’ 스타일의 화이트칼라가 연상된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을 보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하지만 굳이 ‘화이트칼라 노동자’라고 표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화이트칼라와 노동자는 왠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던 청소년 선호직업 기사에서도 이 같은 생각이 드러난다. 청소년들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화이트칼라가 되고 싶어 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취업자 중 화이트칼라 노동으로 볼 수 있는 직업은 취업자의 약 61%에 이른다. 나머지 제조업과 건설업 등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블루칼라 노동에 종사하는 취업자는 39%다. 이 통계만 보면 화이트칼라 노동이 대세다. 앞으로 경제가 더딘 성장을 보일수록 대세는 더 굳히기에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전형적인 화이트칼라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서비스와 판매 종사자인 22%를 빼도 약 40%에 이른다. 노동시장에 연착륙했을 때 우리는 ‘노동자가 되지 않고’ 뭐가 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 노동계층의 삶도 연착륙할 수 있을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한다. 필자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형적인 화이트칼라인 금융산업 노동자들과 공무원 노동자들은 엄청난 수준의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최근 약 6천명의 금융산업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속되는 구조조정과 성과주의 경영시스템으로 인해 노동자들은 긴 노동시간과, 높은 직무스트레스, 탈진과 우울증, 폭언· 폭행·성희롱을 겪고 있었다. 식사시간과 연차휴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일·가정 양립을 어려워하고 있었다. 병가가 필요할 때도 눈치를 봐야 했다. ‘임금과 후생복지’라는 약간의 긍정적 조건을 제외하면 금융산업 노동자의 삶의 질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응답자의 4분의 1이 넘는 규모가 우울증 적신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단적인 예다.

공무원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고용노동부(근로감독관과 고용안정센터 직원) 노동자들의 경우 어느 집단보다도 높은 우울 수준을 나타내고 있었다. 응답자(약1천600명)의 30%가 우울증 적신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또한 과도한 업무와 민원인으로부터 오는 폭언 등으로 인한 탈진, 정부의 관료주의적 통제와 기준 없는 제도개편 등이 원인으로 지적됐다. 특히 감독업무에 대해서는 사업장 내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이 제대로 지켜지는지 감독하고 노동자의 생명을 지키는 활동이 제대로 이뤄지는지를 살펴야 함에도 ‘체불임금’ 등의 해결에만 묶일 수밖에 없는 처지에 대한 고통이 극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원 노동자들의 상황도 비슷했다. 등기업무를 하는 노동자들의 경우 법원행정처로부터 페널티를 받기 일쑤였다. 실수를 하면 개인의 재산에 불이익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구상권이 청구된다. 그럼에도 2명이 진행하던 등기업무를 1명이 수행하게 해 이들에게 일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재판도 자꾸 늘어나 퇴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것도 문제였다. 그러다가 노동자가 유서를 쓰고 자살을 했다. 인력은 늘지 않는데 새 제도는 계속 도입되고 있다. 이 때문에 우울증 적신호를 보이는 사람이 응답자의 30%에 달했다.

학부모가 선호하는 자녀 취업직종 1위인 공무원도 이 지경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노동자는 블루칼라냐 화이트칼라냐를 불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디고 있다. 우리는 노동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오히려 낮은 고용률을 감안하면 노동자는 더 많아져야 한다. 그러니 이제는 블루냐 화이트냐를 따질 때가 아니라 어떻게 맨 정신으로 일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시기다.


[덧붙이는 글]
1월 16일 매일노동뉴스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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