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04 15:40
금속노조 인천본부 콜트악기지회 조합원 방종운, 일과건강 2007년 12월호
손문자가 들어왔다. “전기분과 경찰과 대치중”
긴 병에 효자, 효녀가 없다는 말처럼 내 마음속에 칼날이 무디어졌는지 안타까운 마음도 이제는 생기지 않는다. 콜트악기 정리해고 투쟁도 장기전으로 되면서 지회장선거에 지부대의원에도 패배 후 몸도 마음도 지치고 지쳤지만 정리해고자를 생각하면 다시 일어나 또 하는 거야하며 엉클어진 마음을 정리해가는 중이였다. 또 손문자가 들어온다. 손문자를 받고도 움직여지지 않는 몸뚱이를 눈으로 무심하게 읽어 내려간다.
무심코 열어본 손문자에 눈이 확 띄며 정신이 확 들어온다. “분신 정해진 전기분과 조합원 부천 순향병원 이송” 피가 머리끝까지 쏟는다. 급하게 달려가 보니 건설노동자, 전기분과 노동자와 경찰과 대치중에 소식을 전해 듣고 달려온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아 이놈의 세상! 더러운 자본의 세상!
“다시 강남성모병원으로 이송!” 속속 소식이 들어온다. 영진전업사 앞에서, 강남성모병원에서 집회가 열린다. 29일 11시 전기원분과 조합원 정해진 열사 사망! 언제까지 얼마나 죽어야 하는가! 정녕 이세상은 바뀌지 않는 세상인가!
영정사진을 보면 “아 그 사람!” 전기분과, 이랜드, 콜트와 연대집회를 하다보면 눈에 들어오지 않는, 말없이 조용한 동지였다. 콜트악기 창립 때부터 20년을 함께 지켜 온 화분이 누나는 “함께 했던 사람인데 우리를 버리고 떠나는 건가?” 영전사진을 보면서 눈가에 눈물을 담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옆에 있었다며.
오랜 시간 투쟁해온 전기본과 동지들은 정해진 열사의 죽음으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나보다. 앞에 막는 전경도 보이지 않았나보다. 전경과 대치하며 싸울 때도 “너희들과 싸우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너희들이 싸움대상이 아닌데. 일하는 사람이 잘살게 해준다고 정치공약을 늘어놓는 놈들, 일해보지 않고 일하는 법을 만드는 썩어빠진 정치인들과 인간의 죽음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돈 귀신들이 싸워야 하는데…” 한다. 그 앞을 막고 있는 놈들이 길을 내주지 않기에 싸워야 한다. 격렬한 투쟁으로 동지들이 많이 잡혀 들어갔다.
계속 이어지는 투쟁으로 헤이해진 마음속에 지은 죄, 투쟁으로 죄를 빌어본다. 노동해방 그날까지 함께 하겠다면 마음속에 약속을 하면서다. 민주노총 인천본부 원학운 본부장이 투쟁연설에서 “단체협약 체결하자, 44시간 노동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지고 파업을 했다. 열사는 94년까지 한국전력공사 구리지점 관내근무를 하다 현재ق만5천 볼트 전봇대에서 낮밤이 없는 비정규직으로 근무를 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는 인간이 인간으로 살고 싶어 하는 소박한 소망을 외치다 영진전업사 131일차 투쟁승리 집회도중 분신 후 오후 9시경 46세 나이로 한강성심병원에서 영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길고 긴 투쟁에서 11월 7일 인천경인노동청 14개 업체 특별근로감독실시가 확정되었다. 인천지역 자본가 놈들이 더욱더 꼴통 짓을 하는 이유에는 노동부 행정정책에 문제가 있다. 한국전력공사 21개 업체 하도급 대표를 맡은 새끼 자본가들의 큰소리에도 노동부가 겁먹을 거고, 애꿎은 노동자들만 죽어나가야 해결되는 세상이다. 큰 책임을 져야 할 노동부를 보면 가슴만 답답했다. 11월 14일, 전국노동자장으로 노동열사 정해진 동지 장례식이 치러지고 그는 마석모란공원으로 떠났다. 노제를 마친 운구행력은 마석 모란공원에 도착하여 많은 열사 묘역 중 또 하나의 열사 묘가 만들어져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떠나야만 했는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서는 노제를 마치고 돌아서는 마음 편할 수 없었다.
300일을 맞이하는 콜텍-콜트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선거로 5기 새로운 집행부가 출발하면서 4기 집행부 임무는 끝났다, 5기 집행부가 4기와 함께하지 않고 대전지부 콜텍과 삼각구도로 엇갈려 콜텍-콜트대책위 구성도 되지 않고 있다. 5기 집행부가 잘하리라 믿으며 4기가 정리해고 투쟁, 07임금인상 투쟁, 콜텍과 연대 투쟁에 책임져야하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한 생각을 버려야 하는데 아직도 마음한구석에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검은 리본을 띠면서 20년 전 87년 7,8,9투쟁을 생각하면 정치활동금지 노동조합법, 빨갱이라 국가보안법, 제3자 개입금지, 쟁의조정법을 온 몸으로 거부하며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겠단 생각으로 화염병도 날리며 법에 매여진 노동운동을 하지 않았다. 손배가압류, 업무방해가 맹위를 떨치며 우리 가는 길에 발목을 잡고 있을 때 87년 조합을 만들던 시절 고생한 가족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아들, 딸이 생각나 편지를 쓴다.
아들, 딸에게
260일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 저녁 늦게 일하고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며 농성장에 찾아와 플랜카드를 보면서 “아버지처럼 제가 다니는 직장에도 노동조합을 만들어 회사의 잘못된 점을 고쳐나가듯 투쟁 할래요.”한다. 아들은 비정규직 법안 통과 후 아들이 다니는 회사도 일거리가 없다며 정규직 인원을 내쫓은 후에 일거리가 많이 왔다며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산업특례병에게 야간수당도 주지 않고 12시까지 부려먹은 것에 화가 났다. 형들이 모여 우리도 노동조합을 하자고 말한다는 너의 말을 들었을 때 아직 네가 나설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군을 필하고 사회에 나와 해도 된다고 말리는 생각을 한다. 만류한 아버지가 어쩌면 이중성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지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든다.
맨 처음 산업특례병으로 간 공장에 적응을 못하여 공익요원으로 간다고 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산업특례병 기간이 4개월 남았구나, 성공회대에 3학년으로 복학하고 산업특례병하면서 모은 돈으로 인도로 IT를 더 배우로 간다는 말에 쌈짓돈이라도 소박한 네 꿈을 펼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버지로서 민주와 너에게 충분히 해주지 못하지만 어렵고 힘든 부분에서라도 너희들이 공부를 더 했으면 좋겠다. 현실의 어려움으로 꿈을 버리고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꿈은 이루어 질 수 없다. 아버지는 가족이 많이 도와주어 고맙고 미안할 뿐이다.
너희에게 무엇을 해주겠냐! 웅배도 현장에서 일을 해보아 알겠지만 억울한 일들이 숱하게 발생한다. 혼자 힘으로 싸운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3권 단결권, 단체행동권, 단체교섭권을 가지고 투쟁과 교섭으로 사회를 바꾸어 나간다. 그래서 남 앞에 서려면 공부도 많이 하고 인간관계, 이해와 덕도 가져야 한다. 어쩔 때는 단호하게 내칠 때도 있어야 하고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데, 아버지 성격으로는 못하는 부분이 많은 것 같구나.
아버지가 지회장 선거에서 떨어졌을 때 많이 힘들었는데, 이 부분을 억울하다고 술로 세상을 한탄해도 세월은 흘러간다. 인생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 살아보니 길은 있더라. 작업현장에 들어가 일하다보니 힘이 들어 술을 먹으면 일을 못하겠더라. 자연스럽게 술이 멀어지며 드는 생각이 억울하다고 화가 난다고 술로 세월을 보냈을 때 아버지 나이 50에 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구나, 젊을 때 일어서기 위한 방황은 좋은 약이 되지만 방황 시간은 지금의 아버지로서 어울리지 않는 것 같구나. 그래도 유일하게 인천본부에서 통일위원장으로 일을 하지만 아버지도 너희들 보기에 창피하지 않을 사람으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한다.
민주에게
너를 가졌을 때 6월 항쟁에 이어 87년 노동자 대 투쟁을 거쳐 이곳까지 왔구나, 뒤돌아보면 엄마가 고생이 많았다. 민주화! 노동자! 노동조합! 부부가 소박하게 가정을 이끌고 열심히 공장에 다니며 돈을 벌면 그것이 잘사는 길처럼 생각했던 시절에 자다가 봉창 뜨듯 늦게 배운 것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정말 열심히 살아왔지만 민주야! 엄마가 고생을 많이 한 것 같다. 구로구청 부정투표함, 수련회, 학습으로 밖에서 밤을 새는 일이 많고 시위현장에서 아버지를 가정으로 데려오려는 노력으로 엄마는 부른 배를 안고 아버지를 찾으러 다니다 너를 낳았다. 민주! 그리고 88년 콜트악기 노동조합을 만든다고 300명 가입을 한 조합원들이 회사의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탈퇴하고 비조합원으로 아버지를 힘들게 하더니 웅배 손잡고, 너를 업고 아버지가 행여 다칠세라! 잘못될세라! 농성장에 온 세월이 이렇게 흘러구나! 격변기 어린 민주의 성격이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지만 오히려 오빠보다도 성격이 마음에 든다. 오빠는 인내성이 있으면서 반골기질이 있고, 너는 개성이 강하고 톡톡 튀면서 반골기질이 있다. 더구나 성공회대학에 떨어져 이불 뒤집어쓰고 울면서 재수하면 힘들다고 동양공전으로 갔는데 알바하면서 공부하면서 벌써 졸업이라니, 아빠 심정으로는 공부를 더했으면 좋겠다.
너희들은 노동자의 아들. 딸이다.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살아온 너희가 자랑스럽다. 오죽했으면 회견보살처럼 죽음을 택한 님들을 생각하며 25년의 세월 속에 그 마음이 안 들었겠냐마는 너희들을 생각하며 눈물을 머금고 참고 싸웠다. 그렇게 싸웠는데 세상은 없는 사람에게 더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니 더 싸워야 할 것 같구나.
가는 길 험난해도 힘들 때 문득 지나온 일이 생각난다. 어렵고 힘들어도 지나고 나면 아픔도 추억되어 내가 걸어온 발자취다. 사회는 붕괴되어 간다. 빛이 아니라 소금이 필요할 때다. 언론, 교육의 피해자는 당사자인 우리들이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소득격차가 20:80에서 5:95로 변해간 것 같다. 사회양극화,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에서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반목하여 싸우고 있다. 빛이 아니라 소금이 필요할 때다. 썩을 대로 썩어가는 사회 합리화를 시키기 위해 동원된 언론, 교육 그 죄를 어떻게 다 받을 지….
조합원을 믿는다. 올바르지 못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민중은 현명하니 진실을 깨달을 거다. 진실은 아픔 뒤에 오는 것이니 말이다.
열사가 가신 뒤에
마음속에 아픔 되어
살아가는 진실을 가리킨다.
살아 있는 자 다시 일어나
가려진 희망을 찾아 가련다.
06년 비정규직 보호법 반대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
족쇄를 채우는 모든 악법들
피 터지게 외쳤던 진실은
왜 세월이 흐르고 난 뒤
아픔 뒤에 오는 것이니 말이다.
검은 리본을 띠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