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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뜨겁다. 

인생과 운동에서 대 선배인 김은혜 부천생협 이사장을 표현할 수 있는 적절한 단어였다. 흰 머리카락 수가 검은 머리카락을 압도했지만 여전히 생활에서 지역에서 소신있는 삶을 이어가는 그의 마음은 ‘언제나 청년’ 바로 그것이었다.


# 일상에서 노동자 건강을 고민한 구로의원 탄생


70학번인 김은혜 선배는 대학교 1학년 때 전태일 사건을 ‘겪어’ 내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알다시피 그 때는 노동자, 노동조합이란 단어 자체가 ‘빨갱이’로 불온시 되던 시대였다. 당시 노동자를 합법으로 만날 수 있던 공간은 산업선교회였기에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영등포산업선교회, 인천산업선교회로 이어졌다. 산업선교회는 노동자를 만나고 그들과 삶을 나누려던 대학생들의 집결장소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자신보다 훨씬 어린 여공들을 만났다. 동일방직, 반도패션, 원풍모방 등 이제는 역사와 기억으로 얘기되는 공장의 노동자들을 만나 상담과 공부가 이뤄졌다. 

그러던 중 노동자들이 건강문제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봤다. 하나같이 소리를 크게 냈는데, 알고 보니 소음이 심각한 곳에서 일해 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공단 지역에 의과 대학생들의 주말 진료활동이 있었는데, 노학연대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자연스런 만남이 이어졌다. 이런 만남은 김은혜 선배가 노동자들의 여러 문제 중 노동자들의 환경, 건강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진다.


고민은 70년대를 넘어 80년대로 이어졌다. 진보적 보건의료인들의 주말 진료 활동과 체계로는 노동자들이 가진 건강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으니 진료뿐만 아니라 상담, 교육 등의 통합 활동이 이뤄지는 병원, 센터를 준비하자는 공감이 그는 물론 보건의료인들에게 생겼다. 그리고 1983년부터 본격으로 준비를 시작한다. 김은혜 선배는 “단순히 개인의 건강관리가 아니라 열악한 노동조건과 한국사회가 가진 여러 모순에서 오는 노동자 건강문제를 진료와 일상에서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이라고 설명했다. 

그 준비가 “소박한 연대부터 진료 공간, 노동자의 건강을 책임질 수 있는 1986년 3월 8일 ‘구로의원’으로 만들어졌다.”며 수십 년 전 날짜까지 정확하게 말해주었다. 노동자들의 병원이었던 그곳에는 보건의료, 법을 전공한 전문가들의 상담활동과 진료활동이 채워졌고 구사대 폭력으로 다치거나 직업병을 의심하는 노동자들의 발길이 구로병원으로 이어졌다. 양길승, 김은희, 최경숙, 박석운… 등 이름만으로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노동안전보건운동 선배들의 이름이 구로병원 이야기에서 마치 엊그제 활동처럼 흘러나왔다.


수도권 지역의 산재, 직업병 등 노동자 건강과 관련된 활동을 담당하던 구로의원 사람들의 고민 중 하나는 ‘노동자 눈높이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였다고 한다. 고민은 바로 노동자 건강과 환경을 주제로 한 워크숍으로 이어졌고 마지막 워크숍 성과로 전문단체 설립을 결의하게 된다. 그 전문단체가 바로 현재 노동건강연대 전신인 ‘노동과건강연구회’이다. 구로의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이 노동과건강연구회 설립 및 활동에 참여했다. 

“너무나, 정말 뜨거운 열정으로 함께 했다. 쌍문동 병원에서 근무하는 회원은 일이 끝나고 와서 사례를 연구하고 조사활동을 수행했다.”고 김은혜 선배는 상기했다. 설립 당시 구로동에 위치했던 노동과건강연구회로 쌍문동에서 출퇴근한 것이다. 상근과 비상근 활동가 모두 ‘열심’이라는 말 자체였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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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작가․만화가․정치인을 깨운 죽음


그리고 1988년 4월. 

김은혜 선배는 문송면 사건의 첫 상담자로 문근면 씨를 만난다. 되돌아보면 인연, 필연이란 단어가 적절한 순간이었다.


충북 태안 원북면이 고향인 송면이는 동네로 직접 찾아온 회사의 “직장에서 돈도 벌고 공부도 하며 꿈을 펼칠 수 있다.”는 말에 졸업도 안하고 서울로 상경, 온도계와 압력계 제조회사인 협성계공에서 일을 시작한다. 1987년 12월이었다. 협성계공은 밀폐된 작업실에서 수은이 액체 상태로 바닥에 깔렸고 수은주입 호수에서는 수은증기가 나오는, 열악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환경이었다. 일한 지 2개월도 안 돼 송면이는 “허리도 아프고 머리도 너무 아프고 이빨도 아프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설이라 내려간 고향에서 그는 쓰러졌고 태안에 있는 병원은 “도시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다. 

고대 구로병원으로 갔지만 증상에 따른 치료만 있었을 뿐이다. 재산을 팔아가며 몸이 아픈 동생을 데리고 병원을 전전하던 문근면 씨는 마지막 희망으로 대한민국 최고라는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박희순 소아과 의사를 만났다. 그는 문송면이 일을 했다는 사실에 “얘가 무슨 일을 했냐?”라고 물었고 소변검사, 피검사 결과 유기용제, 수은중독이 의심되자 구로의원 상담실로 연결해 주었다.


이런 이야기를 문근면 씨로부터 듣자마자 김은혜 선배는 바로 산재신청 준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회사는 생떼 쓰지 말고 시골에 있었으니 농약을 의심하라며 사업주 날인을 거부했고 노동부는 노동자 편이 아니었다. 분노가 마음속에서부터 일었고 행동으로 이어졌다. 

87년, 88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진보언론을 표방하고 창간된 한겨레 신문 등에 언론 홍보, 노동자 집회에서 문송면으로 나타난 작업장 현실을 폭로하면서 노동부에는 계속 문제제기를 이어갔다. 집요한 사회 문제화에 양심있는 지식인, 의료인, 노동자들의 공감이 커지자 노동부는 마지못해 문송면의 수은중독을 직업병으로 인정했다. 3개월여 시간이 흐른 뒤였다.


열다섯 살 문송면은 노동자가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하고 다치거나 아프더라도 제대로 치료받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역할을 남을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운명이었을까? 직업병 인정이라는 큰 산을 넘어 산재 지정병원이던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긴 지 이틀 만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수은 중독 사건이 알려지자 수은을 취급하던 노동자들의 문의가 폭주해 밤을 세며 일하던 중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송면이가 죽었어요.”라는 문근면 씨의 새벽 전화. 그때 느낌을 김은혜 선배는 “머리를 딱! 맞은 것 같았다.”라고 표현했다. 1988년 7월 2일 새벽 2시경이었다.

앉은 자리에서 싸움을 같이했던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렸고 새벽이었지만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곧바로 장례투쟁위원회가 꾸려졌고 “송면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자.”며 단순 장례투쟁이 아니라 산업안전보건 정책 전반에 문제를 제기하고 산재추방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뜻이 모아졌다. 사회운동단체가 아니더라도 피지도 못한 꽃의 안타까운 죽음에 많은 시민은 물론 김대중, 김영삼, 이상수, 노무현, 이해찬 등 정치인들의 공감까지 보태졌다. 

김은혜 선배는 “KBS의 다큐작가가 달려왔고 만화가 故 신영식 선생님도 그의 이야기를 보물섬이라는 만화 잡지에 실었다.”며 “너무 어린 학생이 (일하다 수은중독으로) 죽었다는 공감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싸움은 회사의 공개사과와 보상은 물론 노동부로부터 책임자 징계, 산업안전보건대책 마련 등을 성과로 정리되었다. 

그리고 문송면 장례투쟁을 접한 원진레이온 피해자들이 희망을 보았고 7월 17일 송면이가 모란공원에 묻힌 뒤에 불덩이 같은 여름이 바로 이어진다. 김은혜 선배는 “송면이의 죽음이야 말로 노동자의 산업재해, 직업병 문제가 사회화 된 계기”라면서 “어린 송면이가 원진을 살렸다.”고 덧붙였다.


# 성찰 시간 갖는 20주기 되었음…


1988년으로부터 20년. 김은혜 선배는 여전히 노동부가 권위적이고 주무부서는 윗선만 바라본다고 비판했다. “산업화, 근대화, 현대화 과정의 개발논리 속에 희생된 노동자들이 산재추방운동의 토대”라는 그는 “이 일에 긍지와 함께 사회적 책임감도 느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제도에서 (노동자 건강권을) 획득한 사람은 일부이다. 미조직, 영세노동자 등 여전히 사각지대가 많다.”며 “송면이 20주기, 산재추방운동 20년을 맞아 우리 운동을 스스로 성찰해 보는 시간으로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떤 부분을 잘하고 취약한지, 무엇을 극복해야 하는지, 노동운동과의 관계 정립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 주도면밀한 자기진단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운동이 앞으로도 10년, 20년을 나가야 될 비전 제시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제언이었다.


“각 위치에서 강점을 살리며, 산업안전을 둘러싼 여러 인력들이 상생하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부분이 조금 약해진 것 같다.”며 “비판을 넘어서는 대안을 내고 그것을 자기 현장에서 실천으로 창조적이고 건강한 역동적인 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김은혜 선배. 

삶의 근거지가 있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판단에 1992년, 지역으로 활동공간을 옮기는 그는 생명에의 뜨거운 사랑인 노동자 건강권 운동이야말로 인권운동이라며 너무 소중한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겁고 엄숙하고 부담스러운 것보다는 노동자들의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은혜 선배의 말은 세월과 공간을 뛰어넘는 조언이었다.


교육센터는 2008년 초부터 노동자건강권운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과제를 고민해왔다. 그 시작은 아마도 과거를 정확하게 되돌아보는 일부터 출발할 것이고 그것은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마련하는 기회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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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면이 가족과 함께 있는 김은혜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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