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 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일과건강 2007년 12월호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교대노동을 하는 사업장에서 ‘음악 동호회’를 만들고 연습하고 뜻있는 콘서트도 연 주인공들을 만난다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사업장 규모의 크기를 막론하고 글쓰기 모임, 노래패, 율동패, 풍물패 등 활발했던 노동자 소모임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제 투쟁 사업장이 아니면 율동패마저 구경하기 힘들어진 현실의 팍팍함을 전국화학섬유산업노동조합 한국세큐리트 익산지회 음악동호회 ‘억새울림’ 구성원들이 한방에 날려줄 것 같았다. 교대노동을 하는 평일에는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 모임을 가질 수 없는 그들은 주말에 틈을 내 합주 연습실에서 모임을 가져가고 있었다.
12월 어느 일요일, 익산역에서 차로 15분 정도 이동거리에 있는 ‘억새울림’ 합주 연습실에서 그들을 만났다.
각각의 이유로 어우러진 ‘억새울림’
“한 단계 높은 문화 활동이 필요해서”, 문화부장 김광섭(리드기타, 보컬)
“음악이 좋고, 음악으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 좋아서”, 노동안전보건부장 문왕길(드럼)
“정규직, 비정규직의 화합을 가져가고 싶어서”, 비정규노동자 서인원(키보드)
“음악을 하고 싶었던 차에 자리가 마련되어서”, 조합원 박성규(섹소폰)
“동호가 있는 지 모르다가 형님들 얘기 듣고”, 비정규노동자 이완재(코러스 기타)
“음악 동호회 활동 얘기 듣고 제안 받아서”, 조합원 윤익수(베이스 기타)
‘억새울림’에 모인 계기는 저마다 달랐지만 2007년 현재 이들은 정규, 비정규 노동자들이 어우러져 형님, 동생하며 음악에 열정도 쏟고 사회 돌아가는 이야기도 함께 한다.
“솔직히 얘기하면 되지라.”하며 말문을 연 서인원 씨는 “비정규직이어서 받을 따가운 시선과 노동가요의 생소함” 때문에 가입을 망설였지만 지금은 “음악하면서 하는 직장생활이 즐겁고 처음에는 어색했던 노동가요도 노래와 가사마다 뜻이 새겨 있어 이제는 다르게 다가온다.”며 변화된 생각을 말해주었다.
역시 비정규노동자인 이완재 씨는 전에는 정규, 비정규를 모르다가 “회사 내에 차별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만두려고 했지만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계속 다니게 되었다.”며 “행복하다.”고 표현했다.
비정규노동자인 두 사람이 억새울림 활동을 하면서 부딪힌 상처는 같이 일하는 동료 비정규노동자와 관리자들로부터 받았다. 서인원 씨는 “비정규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며 예상했던 일이었지만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해 봐야 얼마나 잘하겠냐는 시선을 깨고 싶었다.”는 그는 비정규노동자, 근무조건이라는 어려움이 있지만 함께하는 형님들과 애로사항도 얘기하며 어울리다보니 “세상 보는 눈이 커졌다.”고 한다.
익산의 한국세큐리트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배운다
그래도 여전히 어려움은 남아 있다. 지난 9월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주로 비정규노동자가 일하는 공간에 콘서트를 알리는 포스터를 붙여 놓았는데 30분도 안 되어서 찢겨져 있더란다. 김광섭 문화부장은 “그런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라며 “음악으로 서로의 벽을 허물고 비정규직 문제에 투쟁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계기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억새울림은 2005년부터 활동해 오던 음악동호회가 2007년 6월에 결성한 밴드이다. 김광섭 부장은 억새풀이 “들판에서 자라는 뿌리 깊은 야생초”라며 “스치는 바람에도 그 고요하던 억새는 수많은 민중의 함성처럼 웅장하고 장대한 울음소리를 낸다.”며 억새울림의 의미를 설명했다.
3교대 근무에다 서로 일하는 부서마저 달라 전체가 모여 연습하는 것이 제일 어려운 점의 하나라는 억새우림은 주중에는 개인연습을 하고 주말을 이용해 정기모임을 갖는다. 합주 연습실에 악기까지 모두 갖춘 것이, 음악에 문외한인 나에게는 놀라워 재정문제를 물으니 앰프는 민주노총 익산시협의회 지원, 각자 맡은 악기와 악기에 필요한 부품들은 개인이 해결했다고 한다. 매월 걷는 회비와 회사의 동호회 활동 지원비로 월세와 운영비 등을 해결하는 중이다. 김광섭 부장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은 있지만 ‘억새울림’ 팀원이라는 자부심으로 연주하고 노래하며 우리만의 색깔을 만들어가는 모든 것이 행복하다.”고 밝혔다.
그들이 보인 첫 번째 색은 올 9월 29일, 익산 중앙체육공원 청소년 수련관에서 연 ‘07 임단투 승리․북한 큰물 피해 돕기 노동자 한마음 음악회’였다. 정기공연을 준비할 때 북한 큰물 피해에 도움을 주는 것은 어떻겠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민주노총 지역본부에서 단사와 가족에 홍보하면서 판이 커졌다. 민주노총 본부장은 물론 지역 노동계 대표자들, 노동자, 가족들이 함께 한 공연은 감동이 있는 성공이었다.
문왕길 부장은 “처음에는 부담이 굉장히 컸는데, 나중에 공연이 끝나고 내려올 때는 성취감이 컸다.”며 객석 반응도 너무 좋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서인원 씨는 “꽃다발도 많이 받았다.”고 은근히 자랑을 하더니 무대에 올라 본 사람이 느끼는 전율과 성취감이 있었고 눈물도 좀 흘렸다고 한다. 그날 모은 성금 60여만 원은 ‘겨레하나’에 전달되었다. 김광섭 부장은 그때를 ‘가장 행복했던 일’이라고 표현했다.
평일에는 근무, 주말에 정기모임, 공연이 잡히면 낮밤이 없는 연습이니 아무래도 집에서 싫어할 것 같다 했더니 다들 정기공연 보고서는 집에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음악으로 즐거운 인생, 좋지 아니한가
2008년 억새울림은 벌써 계획이 가득하다. 지역 투쟁 사업장 참여, 4․30 문화제 공연, 5월 정기공연, 세큐리트 하계휴양소 콘서트 및 노래자랑, 민주노총 익산시지부 가을 문화제 공연 등 집에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자식으로서 불만 꽤나 들을 듯싶다. 특히 정기공연 때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위한 투쟁기금을 마련할 계획으로 음악을 즐기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과 소통하고 투쟁하려는 억새울림이다.
한편, 김광섭 문화부장은 사업장 내에 다양한 소모임 활동을 만들려는 노동조합 간부로서의 계획도 가졌다. 현재 또 다른 그룹사운드가 결성되어 연습 중이고 노래패도 결성되어 곧 합류 예정이라고 한다. 그는 문화부 역점 사업으로 2008년도에 풍물패, 율동패 등을 계속 조직해 세상을 바꾸는 노동운동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단다.
한때 수를 헤아릴 수없이 많았던 노동조합 안팎의 소모임이 이제는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하는 상황에서 조직하는 어려움을 살짝 비켜 세운다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조 회계감사이면서 억새울림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강해정 회장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던 14년 전에는 뭉치는 힘이 많았는데 지금은 개인주의가 많은 것 같다. 개인주의를 넘어서는 데에 소모임 활동이 도움이 된다.”며 문화부장이 말한 계획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