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일과건강 2007년 4월호
GS 깃발 펄럭이는 여수
이제 석 달 후면 해고 3년째인 ‘GS칼텍스 해고 노동자’ 인터뷰와 4월 노동자 건강권 강화의 달을 맞아 개최된 ‘산재보험법 전면 개혁 및 산재노동자 직업병 인정 촉구 결의대회’ 참가를 위해 오랜 만에 발을 딛은 여수에는 거리마다 펄럭이는 깃발이 있었다.
얼핏 GS칼텍스 로고처럼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2010년 세계박람회를 유치하려는 광고 깃발이었다. 하지만 색상이나 그 모양새가 확연히 GS의 그것이어서 ‘여수란 지역에서 GS기업의 영향력이 꽤 센’것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이렇게 GS를 닮은 모양의 펄럭이는 깃발을 보는 GS칼텍스 노동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싶었다.
GS칼텍스(해고 당시 엘지정유) 해고 노동자 이야기를 하려면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4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를 하루 앞둔 23일이 최초로 해고 노동자가 생긴 날이지만 해고의 이유였던 파업의 과정을 보려면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해복투 심명복 씨는 “대 김병원 투쟁에 안 가본 조합원이 없을 정도로 참여가 좋았다. 이후 현장 실태 파악을 위해 실시한 특별보건진단에 현장 조합원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이뤄졌다. 조사연구팀과 같이 행동할 정도였다.”며 당시 정황을 말해주었다.
2001년 특수건강검진 결과가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노동조합의 추적과 김병원의 한 의사가 한 양심선언으로 밝혀지면서 시작된 한 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 역학조사 등의 전면 재조사는 여수산단 노동자들이 얼마나 심각한 유해물질에 노출된 채 일해 왔는지를 드러냈다. KBS 시사투나잇이 GS칼텍스 문제를 다룰 때 회사에 안 좋은 내용으로 인터뷰를 했다는 이유로 해고된 이병만 씨는 “산안교육도 형식적으로 서류에 사인만 하는 정도라 노동자들이 유해물질에 무지했다. 벤젠이 인체에 치명적인데도 예전에는 그것을 손으로 맛보는 수준이었다.”며 특수건강검진 조작으로 촉발된 투쟁이 GS칼텍스 노동자의, 여수산단 노동자들의 유해물질 인식을 변화시키는 계기였음을 말했다. 그리고 문제는 단위 사업장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여수산단’의 문제로 ‘지역 주민의 문제’로 시야를 넓혀갔다. 이 과정에서 GS칼텍스 노조는 2004년 여름, 정유업계 최초로 정규직 노동자 전원이 파업에 들어갔다.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조한 3대 요구로 정유업계 최초 파업
공정시설 정비를 담당하는 건설일용노동자들의 처우개선과 정규직화, 환경을 오염시키며 막대한 이익을 가져가면서도 지역을 위해 아무런 일도 안했던 회사에 지역사회 발전기금 출연 요구, 신규인력 충원을 통한 주 40시간 노동으로 일자리 창출의 커다란 3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700여명의 조합원이 공장을 떠나 20일간 산개투쟁을 벌였다. 투쟁 방법과 작업장 복귀 이후 상황을 보는 해고 노동자의 인식은 약간 차이가 있었지만 ‘떳떳하고 부끄럽지 않은 투쟁’이었다는 점만은 확실했다.
장철 사무국장은 “(정유업계) 최초의 파업이라 “과연 파업이 가능할까?”하며 조합원 스스로 두려워했던 것도 사실이었다.”면서 “물이 끓으려면 과정이 있듯, 잠재적 불만들이 있었고 그것이 2004년에 터진 것”이라며 그 안에는 민주노조를 지켜야 한다는 투쟁의지도 있었다고 전했다.
복귀 이후 노동조합은 한 마디로 ‘깨졌다.’
파업 지도부에게 구속과 실형이 떨어졌고 해고노동자가 발생했으며 650명의 노동자에게는 3개월 정직을 포함한 중징계가 내려졌다. 중징계와 더불어 회사는 굴욕적인 반성문 쓰기와 조합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 제출을 요구했다. 회사는 반성문을 사내 게시판에 올리게 하는 등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에게 극도의 수치심을 안겨주었다.
해고예정 통보를 받고 어쩔 수 없이 반성문을 썼지만 해고되었던 김영복 해복투 위원장은 “해고자들 중에 산업안전보건위원들이 많은데, 산안활동을 하면서 회사가 어려워 할 부분을 건드리니까 찍혔던 것 같다.”며 무슨 일을 해도 해고될 사람은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한 파업은 2004년 불쑥 나온 것이 아니다. 박성준 노동자는 “파업의 요구들은 이미 2002년 단협에서 합의한 사항이었고 2004년에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행할 것을 요구한 것”이라며 당시 합의서를 보여주었다. 대표이사의 선명한 사인이 남은 그 합의서에는 ▽주40시간제 ▽비정규직 사용제한 및 처우개선 ▽향후 3년 이내 10억 원의 지역사회 발전기금 조성 부분이 분명하게 명시되었다. 결국 2002년 합의 내용의 실행방법을 얘기하려던 2004년 임단협은 언론과 정부, 사업주의 철저한 공세로 배부른 노동자의 투쟁으로 허위유포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파업을 후회하지 않았다. 산개투쟁 중 조합원들과 얘기하면 꼭 나오는 것이 있었는데 “형님, (우리) 월급은 안 올려도 비정규직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합니다.”였다. 그리고 몇 십 년을 일하면서도 전체 팀원이 모여 술 한번 마신 적이 없었는데 파업 때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모여 봤다는 얘기가 이어졌다. 교대제 노동치고는 괜찮다는 4조3교대임에도 같은 조원끼리 모일 수 없는 구조였다는 것이다.
파업의 정당성을 떠나 한 가정의 가장인 GS칼텍스 해고 노동자들에게 어렵거나 힘든 점은 무엇일까?
김영복 해복투 위원장은 “자식들에게 능력 없는 아빠로 보이는 건 아닐까?”가 제일 걱정된다면서도 “그래도 회사에 살아남았다면 비굴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내가 나쁜 짓 한 것도 아닌데 걱정 말라고 하지만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 못 하고 남들 다니는 학원에 못 보낼 때, 참 가슴이 아프다.”는 박성준 씨는 회사에 다닐 때 선 보증이 빚으로 돌아왔고 회사의 사택매각으로 조만간 집을 비워야 하는 데 갈 데가 없어 아내에게 참 미안하다고 조용히 얘기했다.
아이가 셋인 이병만 씨는 하루는 집 근처에 해복투 차량을 타고 갔는데 이걸 본 큰 애가 “아빠! 그 차, 타고 다니지마! 친구들이 이상하게 봐.”라고 말하면서도 막내에게는 “커서 판사되가 나쁜 GS회장 꼭 집어 넣어라.”고 한다며 회사가 한 가정에 어떤 분노를 심어주는지 말해 주었다. 장철 사무국장은 “구치소에 있으면서 아내와 참 많은 얘기를 했고 해고가족 생활을 꿋꿋이 하는 아내를 동지로 생각하게 됐다.”며 월급이 안 나오는 것 외에는 달라진 점이 없다고 한다. 심명복 씨는 “2002년, 2004년 구속을 거치면서 힘든 것을 못 참아 하던 아내가 오히려 힘을 주고 있다.”며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기 위해 면회도 아이들과 같이 오게 했다. 경제는 머, 불편할 뿐이다.”한다.
산단역사에 맞는 직업병 전문병원 설립해야
이제 석 달 후면 GS 칼텍스 해고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강제로 쫓겨 난지 3년이 된다. 수억의 수익을 내고도 지역에는 조금도 환원하지 않은 GS가 나쁜지, 같이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처우개선과 수익의 지역사회 환원을 요구한 노동자들이 그른지 판단은 명확해진다.
요즘 여수는 바쁘다. 산단에서 일해 온 건설일용노동자들이 폐암과 백혈병 산재인정을 요구 중이고 여수산단에서 일해 온 노동자의 직업병 발병과 관련된 역학조사가 준비 중이다. 여기까지 오는 그 시작점에 GS칼텍스의 투쟁이 있었다.
▽유해물질이 있어도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화섬연맹과 건설노조가 공동으로 유해물질사업 진행 ▽산단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확보할 수 있는 직업병 전문병원 설립 ▽이동이 많은 건설노동자들이 직업병 발생 시 인정받을 수 있는 관리…
GS칼텍스 해고노동자들이 바라는 일들이다. 오랜 해고 생활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GS칼텍스 노동자들은 위와 같은 ‘희망’을 확연히 갖고 있었고 그 희망을 웃고 떠들며 얘기했다. 아직 현장은 살아있다며 그 힘을 제대로만 모으면 희망은 ‘현실’이 될 것이란 그들의 믿음이 어느 날 여수에서 거짓말처럼 이뤄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