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일과건강 2007년 3월호
원진노동환경강연구소 산업의학전문의에서 ‘메디컬 법률 사무소 의연’ 명패를 달고 지난 3월 정식으로 개업을 한 박영만 변호사.
박영만 변호사를 일과건강 인터뷰 대열에 합류시킨 것은 편집위원 수련회 뒤풀이를 하면서 그가 왜 산업의학전문의에 만족하지 않고 사법시험을 보게 되었는지에서 출발한다. 연구소로 오기 전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진폐담당으로 일하던 중 내과에서 연락이 왔다. 울산의 모 정유회사 노동자가 재생불량성 빈혈에 걸려 병원에 왔는데, 내려가서 함께 역학조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백혈병의 일종인 재생불량성 빈혈은 벤젠 등 유기용매가 원인이 될 수 있는 병으로 이 노동자가 벤젠에 노출되었다면 직업병으로 추정할 수 있었고 역학조사 결과 업무 관련성이 높았다고 한다.
1998년 당시 우리나라 벤젠 노출기준이 10ppm이었는데 근로복지공단은 조사결과 1ppm으로 노출기준 이하이기 때문에 ‘직업병이 아니다’는 판정을 냈다고 한다.
“질병 여부는 과거병력, 가족력, 다른 요인 등을 종합적로 보고 업무와 관련성이 있으면 직업병으로 판정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고농도에 노출되어도 직업병 가능성이 있다. 당시 미국의 벤젠 노출기준은 1ppm이었고, 조사결과 의학적으로는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례였다. 그리고 직업병으로 의심이 되면 우선 보상을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공단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소송으로 직업병 인정을 받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박영만 변호사는 ‘의사가 얘기하는 것은 안 들어주고 같은 소견을 가지고 변호사를 통한 소송으로 인정되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고 한다. 같은 내용을 가지고 행정부는 인정을 안 하고 법원은 인정하는 이중 잣대의 현실이 산업의학전문의로서만 만족할 수 없도록 했다는 것이다.
“행정부가 왜 그런 판정을 내렸는지 법체계를 공부하면서 알 수 있었다.”며 웃는 그는 “그 후로도 벤젠에 의한 재생불량성 빈혈로 직업병 인정을 받은 노동자가 이어졌고 노출기준도10ppm에서 1ppm으로 낮아졌다.”며 당시의 소중한 경험을 풀어 놓았다.
그래도 소위 우리나라에서 ‘사’자가 들어가는 직업인데, 그것에 만족하고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한 가족의 가장이 돈벌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쨌거나 부담이지 않았을까?
“의사 일을 하다보면 순간적인 판단이 중요할 때가 많다. 아프고 힘들어서 오는 환자를 진단하고, 약 처방을 할 때 그 자리에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결정이 느린 편이었다. 시간을 갖고 충분히 생각하고 결론을 내리는 쪽이었다.”
변론 기일이 한 달에 한 번 정도인 변호사에 비하면 꽤나 숨 가쁘게 돌아가는 곳이 바로 병원이었던 셈이다. 순간의 판단보다는 충분히 판단할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던 마음과 병원생활에서 조직생활이 맞지 않다는 체득이 모 정유사 노동자 사건을 계기로 결심했던 사법고시 시험 준비에 덧붙여졌다. 가족의 염려가 왜 없었겠냐마는 ‘평소 가족과 부모에게 잘하는 가장’이 주었던 믿음으로 시험을 준비할 수 있었다.
현재 의사 출신은 변호사는 박영만 변호사를 포함 7명이다. 3명은 로펌에 속해 일하고 다른 네 사람은 변호사로서 일한다. 그는 의료사고보다는 산업재해에 관심이 많다면서도 우리나라 의료체계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갔다. “경제적 수익성 때문에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의사로서는 환자에게 제대로 된 설명을 하기가 힘들다. 제대로 설명을 안 해주었던 데서 오는 환자의 서운함이 소송으로 가는 경우가 있다.”며 소송과정에서 한풀이를 하는 것이라며 실제 노무사나 변호사에게 오는 의뢰 중 정말 사건이 될 만한 것은 10%정도라고 전하며, 공공의료가 시장의료를 보조하는 현 의료체계의 문제점과 갈수록 발달하는 의학이 일으키는 새로운 사고로 의료분쟁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지금은 일과건강 편집위원으로도 함께 하지만 처음 박영만 선생님은 기고자였다. 물론 고료는 없었다. 2006년 9월부터 지난 2월까지 6번 연재되었는데, 주제는 과로사였다.
“최근 행정소송에서 간질환 과로사를 인정했는데, 대법원이 어떤 판단을 할지 주목된다. 그동안 간질환을 과로사로 인정하지 않는 추세였는데 교과서에 간질환과 과로사가 관련 있다는 내용이 없다는 것이 이유 중 하나였다. 책에 그런 내용이 없는 이유는 연구를 안 해서다.”
‘교과서적’ 판단으로 업무상 질병의 인정여부를 확정해서는 안 되는데, 아직 우리나라는 그런 부분이 많이 부족하다는 얘기다. 연재를 다시 하면 어떤 주제로 하겠냐는 조심스런 질문에 직업병 인정과 그 인과관계를 쉽게 다룬 글을 쓰고 싶다며 “쉽고 좋은 글로 독자들이 좋은 정보를 얻고 산업재해나 직업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이 도움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대답이 이어졌다.
과도한 비약이 아니라면 그가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었던 하나의 배경은 대학시절 과동아리 활동과 아주 어렸을 때 직접 경험은 아니었지만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된 건 아닐까 싶다. 집 앞이 금남로와 가까웠던 중앙로였는데 자료에 따르면 중앙로는 항쟁 당시 시민군이 계엄군과 격렬하게 싸웠던 곳이고 계엄군이 시민군을 향해 최초로 발포를 하였던 곳이다.
“당시 초등학교였던 나는 한 두 달간 학교에 안 갔는데, 총소리도 들렸고 시위하는 모습도 많이 봤다. 어머니는 나에게 ‘나가지 말라’고 주의를 주셨다. 대학교 신입생 때 5․18 사진전을 보고 많이 놀랐고 그제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후 박영만 변호사는 민중의료 활동을 하는 학회 ‘의료연구회’ 활동을 시작했고 학회 이름은 법률 사무소 이름 ‘의연’으로 학교 울타리를 뛰어 넘었다.
의연은 여러모로 박영만 변호사와 인연이 있다. 지금의 부인을 그곳에서 만났고, 의연 선배들이 걸었던 산업의학 전공의 길을 이어갔으며 이제는 법률사무소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료연구회 줄임말로 ‘의연’이지만 ‘옳은 법도(儀, 법도 의)가 마땅히 퍼지고 넓혀지는(衍, 퍼질․넓힐 연)’ 뜻이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많이 가진 자와 강한 자보다는 가진 것 없고 법 앞에 약한 노동자들의 인연이 의연에서 많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