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 6일 내일신문 진병기·강경흠 기자의 기사 입니다. 기사 저작권은 내일신문에 있으며 무단전재, 배포, 복사를 금지합니다. 사진 일부는 일과건강에서 덧붙였습니다.


"근무 중 사고 모두 산재 인정하는 법 개정 필요"

 

회사 근무 중에 사고가 나면 산재로 인정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무 중에 노동자가 자해나 고의적으로 사고를 내지 않은 경우에도 산재로 인정받지 못해 노동자들이 소송에 매달리고 있다. 2008년 개정된 산재법의 부작용이다.

 

◆ '자연발생적 악화 뇌질환 산재 배제' 악성 조항 = 회사경비로 근무하던 최 모씨는 54세이던 2005년 뇌간부의 출혈로 쓰러져 요양승인을 받았다. 4년 뒤 병세가 악화돼 뇌졸중으로 사망하자 노모가 유족급여 소송을 냈다. 업무상 질병이 2차로 악화된 것이지만, 법원은 개정된 노동부령을 근거로 산재인정을 거부했다.

 

개정된 노동부령은 뇌질환에 대해 "자연발생적으로 악화되어 발병한 경우에는 업무상 질병으로 보지 않는다"고 배제조항을 강화시켰다. 원인이 잘 밝혀지지 않는 뇌질환이 상당수인 현실에서 이 조항 때문에 최근 들어 고혈압을 지닌 노동자들은 쓰러져도 산재인정을 받는데 어려움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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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한국사회당 홈페이지 갈무리

 

물류회사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김 모(55)씨는 일요일에 출근해 근무하던 중 회사경비실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4시간씩 격일제로 근무하던 그는 이날도 아침 6시에 출근해 건물순찰을 마친 직후였다. 열아홉살된 딸은 "회사근무 중 돌아가셨다"며 유족급여 소송을 냈으나, 법원은 "10년 이상 고혈압 약을 복용했고, 돌발적인 스트레스 요인이 없었다"며 산재를 거부했다.

 

법원은 "사망 직전까지 고혈압이 잘 조절되고 있었으며,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노동부령은 뇌질환 규정에서 과거엔 인정했던 고혈압성 뇌증·협심증·심근경색증을 배제해 버렸다.

 

권동희 공인노무사는 "과거엔 업무 중 뇌출혈 등은 대부분 산재로 인정했으나 지금은 많은 경우 거부되고 있다"며 노동자들에 대한 산재보장이 후퇴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 소음심한 환경 고혈압 환자에게 서로 다른 판결 = 섬유회사에서 제직원으로 근무하던 안 모(40)씨는 점심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회사 마당에서 갑자기 쓰러졌다.

 

뇌동맥류 파열과 뇌출혈 진단을 받고 요양신청을 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기존 고혈압이 원인이라며 요양을 거부했다. 법원도 "연장근무를 자주하면서 업무상 과로를 하고, 귀마개를 착용해야 할 정도로 소음이 심해 스트레스를 겪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급격한 업무환경 변화로 발병했을 만한 사유가 없다"며 원고패소로 판결했다.

 

반면 휴게실에서 쓰러져 사망한 철도기관사인 강 모(57)씨는 평소 고혈압을 앓고 하루에 담배를 한갑 이상 피워 "자연발생적으로 악화돼 발병한 경우"라는 이유로 공단에서 유족급여를 거부당했으나 법원은 산재로 인정했다. 법원은 강씨가 일반근로자에 비해 야간근무비율이 높고 좁은 기관실에서 고속주행할 때 강한 진동을 겪는 환경에서 일했다는 점을 참작했다. 법원은 강씨의 사망과 유족급여신청이 산재법 개정 전인 2007년 말에 발생했기 때문에 구 산재법을 적용했다.

 

근로시간 중에 발생한 사건이며 고혈압이 있는 상태에서 소음이 심한 환경에서 발병했음에도 서로 다른 판결이 내려진 것이다.

 

◆법원이 찾아낸 묘수로 인정받은 기숙사 추락사고 = 27세의 정 모씨는 회사 기숙사에서 생활하던 중 다락방에서 떨어져 뇌손상을 입었다. 공단은 이에 대해 회식 후 술을 마신 상태에서 동료와 장난을 치다 떨어진 것은 정상적인 업무가 아닌 사적 행위에 해당하므로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을 달랐다. 법원은 "다락방에서 동료와의 실랑이를 마치고 물을 마시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던 중에 난간을 잡은 손이 미끄러져 추락한 것"이라며 '실랑이를 벌인 사적행위'가 아닌 '실랑이 종료 후 회사시설의 이용 중 발생한 사고'라고 판단했다.

 

정씨의 경우는 법원이 묘수를 찾아냈다고 할 만큼 기지를 발휘해 법의 보호를 받은 경우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나라 산재법의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이 지나치게 인색하다는 점도 반증하는 사례다. 회사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도 여러 단서를 달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산업재해보상법은 "업무상의 사유에 따른 근로자의 부상·질병·장해 또는 사망"을 '업무상 재해'로 규정하고 있다. '업무상의 사유'를 기준으로 삼고 있어 회사근무중이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업무기인성'이 '업무수행성'보다 중시되기 때문에 퇴근 후에 사망해도 업무가 원인이라면 산재로 인정하고 근무 중에 사고가 나도 업무와 관련이 있는지 엄격하게 따지고 있다. 1964년 법이 처음 제정될 때는 "업무수행 중 그 업무에 기인하여 발생한 재해"라고 하여 퇴근 후 사고는 일절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그나마 1981년 "업무상의 사유에 의한 근로자의 부상, 질병, 신체장해 또는 사망"으로 바꾼 것이다. 어쨌든 현재 산재 인정의 골간은 저임금 경공업위주의 전두환 정권 때의 틀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 근무 중 모든 사고 산재 인정 = 한편 프랑스는 사회보장법상 "임노동 또는 모든 사람의 노동으로 인하여 또는 노동 중에 발생한 재해는 원인 여하에 불구하고 산업재해로 한다"고 규정해 업무기인성과 업무수행성을 나란히 인정하고 있다.

 

회사 근무 중 사고는 모두 산재로 인정하고 회사 밖의 사고는 업무 관련성을 따져 인정하는 방식이다.

 

서울행정법원의 한 법관은 "회사에서 발생한 사고에 대해 노동자들이 일일이 법원에서 시비를 가려야 하는 것은 산업현장의 근로의욕을 떨어뜨리고 노동자에게 이중고통을 주는 행위"라며 "우리나라도 회사 안에서 발생한 경우엔 자해나 고의로 낸 사고, 업무와 명백히 무관하다고 입증된 질병만을 배제하고 모두 산재로 인정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진병기 강경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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