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0 13:21
이 기사는 일과건강 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노동자 건강권 운동, 식탁 위 쇠고기처럼'의 일부 내용입니다. 필자는 노동건강연대 사무국장 이상윤 님이며 사진과 글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고맙습니다.
MB정권 출범과 공세에 먼저 일어난 것은 대중이었다. ⓒ 이현정
2008년은 촛불을 빼고 얘기할 수 없다. 5월부터 타올랐던 촛불은 6, 7월을 넘어 8월까지 넘실거렸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사실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문제는 한미FTA 협상 초기부터 사회운동 진영이 문제 제기한 것이다. 2005년부터 문제 제기가 시작되었으니 근3년 간 꾸준히 알려진 문제가 그 때 그렇게 터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답답한 전망 속에 대중 먼저 일어서다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진영은 2008년을 우울한 전망 속에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대대적인 민영화 정책과 노동 배제 정책이 추진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대운하 사업, 공기업 민영화, 의료 민영화, 사교육 강화, 방송 민영화, 물·전기·가스·철도 민영화 정책 등이 적극 추진될 것이 예상되었고, 실제로 인수위원회는 그것을 확인해주었다. 객관적 상황도 이와 같이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더욱 난감한 것은 사회운동 및 노동운동 세력의 주체적 조건이었다. 진보정당운동은 둘로 쪼개져 반쪽이 되어버렸다. 노동운동 진영은 어려운 조건 속에서 수세적이었다. 사회운동 진영 역시 사회적 자원 부족으로 허덕이고 있었다. 어려운 정세를 어떻게 해쳐나갈지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그런데 한국의 대중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이후 잇단 실정을 되풀이했다. 인수위 시절부터 국민들의 신뢰를 잃었다. 하지만 출범한지 몇 달밖에 안된 정부에 대한 지지 철회가 그렇게 급속도로 이루어질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단지 그러한 대중의 실망과 비판을 빠르게 조직해야 한다는 당위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운동권보다 대중이 먼저 움직였다. 5월 1일 노동절 집회 때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라고 느낀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매년 노동절 집회 후에는 거리 행진을 하며 선전전을 진행한다. 그런데 최근 몇 년간은 거리 시민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대학로에서 집회를 하고 종로로 행진할 때 종묘공원이나 탑골공원 앞 할아버지들의 반응은 늘 시위대에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그게 그렇지 않았다. 2008년 5월 1일 노동절 집회 시위대는 거리 행진 내내 거리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종묘공원과 탑골공원 앞 할아버지들조차 박수를 치며 ‘이명박 반대’를 같이 외쳐 주셨다. 그 때 시위에 참여했던 우리들은 ‘아, 뭔가 달라지고 있구나’하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리고 첫 번째 촛불집회가 바로 다음날인 5월 2일 청계광장에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게 운동권들이 모은 집회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2일, 3일 연일 1만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청계광장에 모여 촛불을 들었다. 초반에 모인 이들은 중·고등학생들이 많았다. 이들이 자유롭게 발언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구호를 외치며 촛불집회를 만들었다. 이 집회가 장장 4개월여 동안 진행되며 서슬 퍼랬던 이명박 정부를 주춤하게 만들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경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수 개월 넘도록 지칠 줄 몰랐던 촛불운동은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점이 많았다. ⓒ 이현정
잠시 멈춘 MB정부 개악 드라이브
촛불의 열기가 주춤하고 있는 지금, 촛불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존재한다. 긍정적인 평가부터 부정적인 평가까지 가지각색이다. 나는 이 지면에서 촛불에 대한 평가를 진행할 생각은 없다. 단지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고 그것이 우리 노동안전보건운동에 주는 시사점을 얘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촛불과 관련하여 확인할 것은 그 힘이 어쨌든 이명박 정부의 개악 정책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이다. 촛불이 없었다면 이명박 정부는 취임 초기 기세로 올 한 해 동안 여러 가지 정책을 힘있게 추진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취임 초기 촛불의 기세에 눌렸고 그 결과 많은 개악 정책을 포기하거나 ‘일단 정지’시켰다. 물론 지금 다시 그 정책들을 추진하려는 의지를 보이나 초반 기세보다 못한 것은 사실이다. 노동안전보건 정책 관련해서도 규제완화 정책이 예상되었으나 촛불 기세에 꺾여 지금껏 가시적인 추진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촛불은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문제뿐 아니라 다른 이명박 정책의 예봉까지 꺾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정작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는 수입되었지만 다른 정책들은 제고되거나 폐기된 것이 많다.
대중 신뢰와 소통이 자발성 키워
촛불이 우리 사회운동 진영과 노동운동 진영에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의 자발성이 표현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중은 무관심한 것 같아도, 무책임한 것 같아도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선다. 그것을 신뢰하지 못하면 운동은 희망을 잃을 것이다. 물론 언제나 대중이 옳거나 정의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길은 대중으로부터 열린다. 대중이 움직이지 않으면 운동도 없다. 노동안전보건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이 없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은 사상누각이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들이 노동안전보건 사안에 관심 없어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래서 운동하기 힘들다고 푸념한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서 노동안전보건 의제는 늘 임금이나 고용 의제에 밀린다. 그런데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늘 그럴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노동자 없는 노동안전보건운동을 기획한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실패다. 어느 누가 식탁에 오르는 쇠고기 문제 때문에 이와 같이 큰 운동이 벌어질 것으로 예측했겠는가. 물론 미국산 쇠고기 문제와 노동자 건강 문제는 문제의 성격이 다르다. 식탁의 쇠고기 문제보다 노동자 건강 문제를 대중운동으로 만들기가 객관적으로 더 힘든 게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자 건강 문제도 노동자 대중 투쟁의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설사 그런 일이 현실화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그렇게 믿고 노동자들을 조직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노동안전보건운동 진영은 조직된 노동의 상황만을 보며 일희일비하지 말아야 한다. 서운하게 생각해도 어쩔 수 없지만, 이번 촛불 정국에서 가장 늦었고 행동이 굼떴던 운동세력이 조직된 노동 세력임은 부인할 수 없다. 일각에서는 그 이유를 촛불 의제 자체가 계급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과연 촛불 의제가 계급적이었다고 해서 조직된 노동의 참여가 이보다 나았을 것인가 솔직히 자문해 보면 그러한 논란의 의미는 반감된다. 확실히 현재 한국의 조직된 노동은 여러 면에서 위기다. 이번 촛불 정국은 그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조직된 노동이 위기라고 해서 노동운동 자체가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다른 운동과 달리 노동운동에 있어 조직된 노동의 힘과 지향이 운동의 성패에 결정적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직된 노동의 무기력만을 탓하면서 운동을 비관해서는 안 된다. 이번 촛불이 보여준 바와 같이 행동하는 대중의, 자발적인 노동자의 너른 바다는 조직된 노동 너머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4.28추모제에서 촛불을 든 노동안전보건 활동가들. ⓒ 이현정
명확한 의제로 장기 전망 갖자
그런데 대중의 중요성을 강조하다 보면 역편향이 있을 수 있다. 정책이나 교육, 선전에 대한 상대적 무시가 그것이다. 그러나 의제의 명확함 없이 대중을 조직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촛불이 그와 같이 거대하게 움직였던 것은 자그마치 3년 동안 관련 전문가들이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외교통상정책을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을 끊임없이 과학적으로 증언해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책, 교육, 선전이 없었다면 그와 같이 거대한 대중의 일어섬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 교육, 선전은 몇몇 전문가와 운동권이 계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촛불의 교육, 선전은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결과 어느 순간부터는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내용을 생산하고 선전, 교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노동안전보건운동도 노동자들과 소통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정책 개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 및 운동 의제를 노동자들과 소통하며 선전, 교육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우리 운동도 몇몇 전문가들과 운동권이 시작할지라도 나중에는 노동자들이 직접 내용을 생산하고 선전하며 교육하며 소통하는 것을 꿈꿔야 한다.
촛불과 함께 했던 2008년은 희망과 더불어 낙담도 던져 준 한 해였다. 그러나 촛불운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그 시사점을 우리의 자양분으로 삼는다면 너무 낙관할 일도 너무 비관할 일도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촛불이 가르쳐 준 길을 따라 다시 2009년을 노동안전보건 운동의 촛불이 넘실거릴 한 해로 만들 꿈을 꾸며 실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