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3.10 12:30
이 글은 일과건강 2008년 12월호 기획특집 '노동자 건강권 운동, 식탁 위 쇠고기처럼' 내용의 하나 입니다. 게재된 사진과 글을 인용하실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세요. 고맙습니다.
2005년 4월 28일에 처음 열린 4.28세계산재사망노동자추모제.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제 유래와 의미를
알리는 선전물을 전시했다. ⓒ 이현정
빛나지 않았던 시작
과장된 표현을 쓰자면 시작은 꼽사리였다.(곡해를 막기위해 부연설명을 하지면 행사 자체가 아니라 당일 현장 상황을 이야기한 것이다.)
2005년 4월에 대한민국에서 처음 열린 4·28세계산재사망노동자추모제(4·28추모제)는 비정규권리보장 입법쟁취 민주노총 결의대회 뒤에 열렸다. 그리고 일이백 명의 대부분은 민주노총 서울본부의 빈곤과 차별없는 서울 만들기(차없서)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일터에서 사고로 직업병으로 혹은 치료도중 자살로 산재사망 한 이들을 추모하는 분향소도 차리고 4·28추모제 의미와 유래를 알리는 선전물도 전시하였지만 2005년 추모제는 ‘처음’이라는 의미를 빛낼 만큼의 조직과 인력을 갖추지는 못했다. “올해 민주노총에서 1노조1사업을 진행한다고 하는데 작년처럼 플랭 하나 걸고 마는 사업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구체적으로 조합원들이 함께 같이 할 수 있는 사업들을 진행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2006년 일과건강 4월호 33쪽)라는 평가의 단면처럼 2005년 4·28추모제는 대중(조합원)과 공감하는 행사는 아니었다.
담당간부 아닌 민주노총 몫으로
이런 분위기는 2006년에도 이어진다. 4월이 노동자 건강권 쟁취의 달이라 기본으로 몇 개의 행사가 기획되지만 각 사업의 대중성 확보 여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중요한 변수가 생긴다.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 담당 임원이 세워지고 위원회가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4월 일정은 ▽26일 2006 노동자 사망사고 최다사업장 명단발표 기자회견 및 산업재해 사망사고 전시회 ▽27일 정책토론회 노동자 건강권 확보를 위한 민주노총의 과제 ▽28일 각 지역본부 주최 전국 동시다발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및 산재보험 공공성 강화 노동자 건강권 쟁취 결의대회였다.
주목할 것은 민주노총이 노동자 건강권을 주제로 정책 토론회를 열었다는 점이다. 사무총장이 사회를 맡은 이 토론회는 노동자 건강권이 담당 간부 혼자 짊어질 몫이 아니라 총연맹 내에서 주요하게 다뤄질 사안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안전보건위원회 건설을 조직적 과제로 선정하고 실무역량 강화를 위한 인력충원 문제가 제기됐다. 2005년 중앙위원회에서 노동안전보건위원회 건설이 결의된 뒤 무늬만 있었던 상화에서 위원회다운 위원회 건설이 내부 동력으로 추진된 것이다. 이제부터 4월 사업도 4·28추모제도 2005년 그것에 비해 풍성해진다.
2006년 4월 민주노총의 노안을 주제로 한 내부토론회 개최는 안전보건에 새로운
의지를 보여주었다. ⓒ 이현정
2007년 4월 28일 보신각.
주변에 산재사망 및 원진레이온 직업병 투쟁 사진전이 설치된다. 이날은 한미 FTA를 반대하던 택시노동자 故 허세욱 동지 및 산재사망노동자 추모를 위한 시민문화제 형태로 열렸다. 1988년 직업병 투쟁 당사자였던 원진레이온 직업병 피해노동자들이 참여하고 ▽2007년 3, 4월 사망자 현황 ▽산업재해로 사망한 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 ▽살풀이 춤 ▽원진투쟁 동영상 상영 등 이전보다 다양함을 담은 추모제를 열었다. 하지만 이때 4·28추모제 역시 독자 행사를 치를 만큼의 조직력은 확보되지 않아 차없서와 함께 공동으로 행사를 주관했다. 그리고 2008년. 즉 올해는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가 일찍부터 4월을 계획하면서 4·28추모제는 물론 그달 자체가 노동안전보건 사업으로 꽉 찬다
.
이른 기획과 조직으로 비약적 풍성함 보여
“추모제 당일에 동원도 잘 되지 않았고 노동안전보건 담당자 참여하는 정도의 행사를 극복하자는 것이 1년(2007년) 전체 평가였다. 그래서 올해는 일찍 기획해야 현장과 함께 사업을 준비하고 연맹별로는 가장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겠다 싶었다.”(2008년 일과건강 3월호 33쪽)는 민주노총 김지희 부위원장(노동안전보건위원장)의 말은 강좌를 비롯해 ▽이천참사 토론회 ▽추모기간 선포 ▽‘노동건강의 봄바람을’ 순회투쟁단 활동 ▽노동자건강권쟁취투쟁의달 선포 결의대회 등 실천 사업으로 이어졌다. 단위별 조직별로 4·28추모제 당일에 맞춰 기자회견과 집회도 열렸다.
2008년 4월 28일 하루에만 청계광장의 산재사망노동자추모제를 포함해 ▽삼성반도체 노동자 백혈병 집단 산재신청 기자회견(반올림) ▽화물노동자에게 산재보험 적용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운수노조) ▽2008 최악의 살인기업 선정식(민주노총·노동건강연대·매일노동뉴스) ▽산재은폐 살인기업 삼성규탄 결의대회 등 서울에서만 5개의 행사가 개최되었다. 촛불을 밝혔던 저녁 4·28추모제에도 노동조합·노안단체·종교단체·피해자단체 등 2백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를 추모하였다.
무엇보다 순회투쟁단은 7박 8일 동안 노동자 건강권 이슈가 있는 10여 개 지역을 자전거로 돌며 지역 노동조합, 단체와 결합해 선전과 집회를 가졌다. 현장에서 죽은 혹은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절박한 상황을 알렸고 호응도 얻었다. 또한 안전보건 활동가들만의 공감이 아니라 조합원 나아가 대중과의 소통을 위해 추모 초와 리본, 선전물이 담기 ‘4·28추모 3종 세트’가 기획 제작되어 판매되었다. 일부였지만 천주교 산재사목회 노력으로 4월 28일 즈음의 서울대교구 미사에서는 산재사망 노동자를 추모하는 내용이 들어갔다.
2008년 4.28추모제에는 2백여 명의 노동자, 시민이 모였다. ⓒ 이현정
올 해 4월 사업이 이렇게 발 빠르게 마련되었던 것은 4월 총선이라는 정치 일정의 영향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지난 3년 동안 해온 사업에서 얻은 과오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위원회를 중심으로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는 (과장하여) 꼽사리라고 표현했던 2005년에 비하여 비약적인 풍성함을 이뤘고 존재감을 키웠다.
어떤 밥맛을 준비할 것인가
올 해 같은 흐름이 내년에도 또 내년에도 지속하여 이뤄질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주노총과 각 연맹에서 노동자 건강권이라는 의제가 전체 운동이나 조직화와 동떨어진 단어가 아님을 인식한 사실로부터 미래는 답보가 아닌 진전에 무게를 실을 수 있겠다.
물론 과제도 있다. 화섬, 건설, 공공운수 등 참여가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동력의 큰 힘은 금속노조에서 나오는 점, 비정규직·중소영세사업장·이주노동자 끌어안기, 민주노총에 노동자 건강권을 책임지는 단위가 튼튼해지면서 상대적으로 작아진 안전보건단체의 역할 모색 등이 그것이다.
한술에 배부르지 않는다. 지난 3년이 잔치를 위해 밥을 짓고 상을 차리는 준비였다면 올 해는 사람들을 모아 잔치 의미를 잘 알려내는 해였다. 이제 모여든, 그리고 모여들 사람들에게 어떤 맛의 밥과 반찬을 줄 것인지 기획하고 실천을 준비할 때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단위 혼자만의 역할로 던질 것이 아니다. 민주노총이 안전보건단체가 피해자 단체가 함께 준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잔치의 참 맛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