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명 사망 파키스탄 의류공장 화재, 남의 나라 이야기?
“사람보다 옷 걱정만 했다”… 대부분 언론 단신 처리
2012년 9월 14일 미디어오늘 이재진 기자의 기사 입니다. 기사 저작권은 미디어오늘에 있으며 무단전재, 배포, 복사를 금지합니다.
파키스탄 카라치 지역의 한 의류 공장에서 지난 11일 저녁 300명 가까운 노동자가 화재로 죽은 사고가 발생했다. 사상자의 수로 볼 때 최악의 참사로 기록될 만하다.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경영진이 공장 출입구를 막아놓는 등 기막힌 현실이 놓여있다.
그런데 관련 뉴스가 보이지 않는다. 지상파 방송 3사 주요 프라임 시간대 뉴스 프로그램에서는 국제 뉴스로 리비아 미 대사관 테러 사건만 줄기차게 보도되고 있다. 지난 11일 화재 사고가 발생하고 난 뒤 주요 일간지 신문들은 관련 소식을 전했지만 대부분 단신에 그쳤을 뿐이다.
먼 나라 사고 소식에 굳이 뉴스를 내보내야 하냐고 항변할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만에 하나 파키스탄보다 조금 더 잘 사는 나라나 혹은 선진국에서 이 같은 사고가 발생했다면 뉴스는 어떻게 가공돼 세상 사람들과 만났을까?
적어도 '선진국에서 이런 최악의 참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까'라고 놀라며 대서특필할 것이라는 예상은 어렵지 않다. 최대 사상자를 낸 파키스탄 화재 사고를 놓고도 우리나라 언론이 이상하리만큼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이유는 저소득 국가에서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고로 치부해버리고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노동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과거 우리나라도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애써 눈을 감으려는 무의식을 반영한 결과라는 지적이다.
그나마 지난 13일 한국일보와 14일 한겨레 신문의 보도가 이번 사고의 실상과 배경을 파악할 수 있는 사실관계를 조금이나마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지난 13일 한국일보는 AP통신을 인용해 지난 11일 밤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의 4층짜리 의류공장에서 불이 나 공장 내부에서 작업하던 종업원 등 289명 이상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특히 영국 BBC 방송을 인용해 사상자 대부분은 인체에 해로운 염색 약을 다량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종업원 상당수가 질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전하면서 공장이 비상구나 환기구 등 화재 대비 시설을 갖추지 않은 점, 작업 때문에 건물 창문을 폐쇄하고 있었다는 점 등을 들어 사상자가 늘어났다고 분석했다.
한겨레 신문 14일자 <파키스탄 의류공장 화재로 289명 사망한 배경엔…>이라는 기사에서는 이번 사고의 배경이 인재(人災)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겨레는 "불이 난 4층짜리 건물은 화재 당시 외부와 통하는 문이 한 곳밖에 없었다. 다른 비상구들은 모두 잠겨 있었고 창문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다. 물론, 화재경보나 스프링쿨러도 없었다"고 전하고 "공장주는 옷을 도둑맞거나 노동자들이 근무시간 중에 몰래 빠져나갈 것을 염려해 출구를 폐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공장에서 일했던 무함마드 페레즈는 '사장은 노동자들보다 옷 걱정을 더 많이 했다'며 '만약 비상구가 열려 있었다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구했을 것'이라고 <파키스탄 데일리 타임즈>에 말했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경영진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환경을 개선시키지 않아 수백 명이 죽는 인재가 발생했다는 것이 국제 언론의 공통된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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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 9월14일자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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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한겨레는 "(파키스탄) 정부는 지난 2003년부터 산업지대인 펀자브와 카라치 지역에선 감독관들이 공장을 방문해 전기안전검사를 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등 근로감독, 안전시설 규제를 지속적으로 완화해왔다"면서 "노동인권 민간기구인 '파키스탄 노동 연구소'(PILER) 의 활동가 샤라파트 알리는 '지난해 151명의 노동자가 산업재해로 숨졌고, 여기엔 정부 책임도 크다'며 '정부는 더이상 노동자들의 건강·안전을 보장하는 법을 위반하는 공장주들을 방조하지 말라'고 지적했다"고 전했다.
현지 언론이 바로 본 파키스탄 화재 사고의 실상은 더하다. 파키스탄 현지 언론 <dawn.com>은 일부 생존자의 증언을 빌려 화재 사고 당일 악몽 같은 현장을 생생히 전하고 있다.
이 언론에 따르면 일용직으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 알리는 무거운 재봉틀로 쇠격자로 짜여져 가로막힌 창문을 겨우 부수고 4층에서 뛰어내려 골반과 팔이 골절됐다. 알리는 "나는 나의 생명을 구해주신 신께 감사드리지만 그곳에 남아있던 사람들과 임신 중이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비통해했다.
200여 명이 넘는 3층 공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모하메드 아시프(20)는 "구조자들은 창문에 구멍을 내고 우리를 끌어냈고 로프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러나 내부는 너무나 뜨거웠고 나는 이것을 사용할 수 없었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창문을 통해 점프했는데 창문의 쇠창살은 극도로 뜨거웠고 내 몸이 닫는 순간 나의 얼굴과 팔은 불에 탔고 발 역시 부풀어 올랐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번 사고로 형제와 사촌 등 7명의 가족을 잃은 리아콰트 후세인(29)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화염 속에 뛰어들었다. 그는 "내가 아내를 구하려고 시도할 때, 나는 동료를 구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의식을 잃은 채 바닥에 누워있었다. 전기는 나갔고 전체가 연기로 가득찼다"며 참혹한 현장의 모습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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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경제 9월 13일자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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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언론만큼의 보도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 사고는 단일 사업장의 산업재해로 인한 사상자가 세계에서 최대를 기록할 정도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언론은 물론 노동계에서도 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국제 노동인권의 현실을 제대로 짚어주는 언론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국내 언론 단신 보도 중에는 사실관계마저도 틀린 오보도 눈에 띈다.
지난 13일자 매일경제 <파키스탄 의류공장 화재 289명 사망>이라는 기사에서는 카라치 지역 의류공장에서 289명이 사망하고 라호르 지역 신발공장에서 최소 21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지만 지도상 두 지역의 사고 내용이 바뀐 그래픽이 게재돼 독자들에게 큰 혼동을 주고 있다. 명백한 오보다.
누리꾼 아이디 'shym'은 "지난 1994년 4월 28일 태국의 심슨인형 제조공장에서 평소 노동자들이 인형을 훔쳐갈지 모른다며 공장 문을 잠가두는 바람에 탈출할 수 없어서 188명의 노동자가 죽는 대형 화재사고가 발생했고, 이 같은 사고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매년 4월 28일 세계 산재 노동자 추모의 날이 지정돼 행사를 갖고 있다"며 "이번 파키스탄 화재 사고도 경영진이 옷을 훔쳐 갈까봐 출입문을 닫아놓아서 대형참사로 번진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20년이 흘렀는데도 노동인권 측면에서 전혀 변하지 않았는데, 이를 제대로 알리는 언론이 없어 서글프다"고 말했다.
이재진 기자ㅣjinpress@media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