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과 미국의 화학물질 관리제도 개혁을 환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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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25일 미국 상원의회에서 『화학물질안전법』이 상임위를 통과했다. 아직 본회의를 통과한 것도 아니건만 미국의 환경운동 단체와 노동조합은 이미 새로운 역사를 썼다며 자축하느라 난리다. 나 역시 신이 났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관련 소식들마다 '좋아요' 버튼을 클릭했고, 아예 이번 사건의 의미를 간략히 정리하여 내 담벼락에 올려놓기도 했다. 『화학물질안전법』이란 1976년 제정된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을 개정하는 법률이다. 이 법률이 통과된다는 것은 미국의 화학물질규제정책이 36년 만에 대수술을 받는다는 뜻이며, 『화학물질 등록, 평가, 허가 및 제한에 관한 법률(REACH)』이 2007년 유럽에서 시행된 것과 버금가는 사건이 될 것이다. 이건 미국인들에게만 기쁜 일이 아니며, 유럽과 아시아 모든 대륙의 노동자 시민들이 환영할 일이 분명하다. 

암환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고, 불임부부는 계속 늘고 있다. 어린이들에게 천식이나 아토피가 심각한 문제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 일이며, 최근에는 자폐나 과잉행동장애(ADHD)와 같은 발달장애가 놀라운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들이 화학물질과 관련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부는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을 관리하며, 폐기물로 인한 지하수오염 방지 등의 노력을 통해 국민들을 화학물질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장담하였지만, 국가의 관리는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10만 종 정도의 화학물질이 유통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무엇이 어떤 독성을 가지고 있는지 미처 다 알지도 못한 채 사용하고 노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화학물질을 제조하는 기업은 독성테스트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시장에 내놓았고,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은 보다 낮은 가격이라면 그저 좋았다. 화학물질은 공장의 굴뚝과 폐수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샴푸나 로션, 방향제, 세척제, 문구와 완구류 같은 제품을 통해 사람들의 몸으로 침투하였다. 

미국과 유럽의 화학물질 관리제도 개혁의 핵심은 바로 정보에 있다. 모든 화학물질의 독성정보가 확인되어야 하며, 그 정보가 시민과 노동자에게 전달될 것이다. 따라서, 생식독성이나 발달장애와 같은 항목에 대해 독성 테스트를 안하고 넘어가던 관행이 끝나게 된다. 한편, 발암성이나 생식독성이 있는 물질, 환경호르몬이나 몸안에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는 잔류성독성물질들은 점차 금지시키게 될 것이다. 싼 가격이면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환경과 안전, 건강을 고려하여 보다 안전한 화학물질을 선택하도록 시장이 변화될 것이다. 

자, 이쯤에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누가 이러한 제도개혁을 이끌어냈을까? 오바마 대통령일까? 답은 시민과 노동자들이다. 미국의 환경보건단체들은 2005년에 한자리에 모여 10년 후 반드시 화학물질관리법을 개혁하겠다고 다짐한다. 2005년이면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부시정권이 집권하였고, 연방정부에서는 개혁의 씨앗을 뿌릴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꾸었다. 어려움은 아주 많았다. 초기에는 각 단체별로 입장 차이가 컸다. 화학물질 관리를 어떻게 해야 세상이 안전해지는지 각자 내놓는 답이 달랐다. 몇 년 간 이들은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했다. 내부의 입장 차이를 발견한 것이 유일한 성과였다. 이들이 만든 개혁입법안은 국회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공청회 한 번 열리지 못했다. 하지만, 이들은 입으로만 싸우고 있지는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부시 정권을 버리고, 지방정부를 공략했다. 메인주, 워싱턴주, 캘리포니아주, 메사추세츠주에서 유해물질을 금지하거나 관리를 강화하는 주법률이나 정책을 이끌어냈다. 대중적인 캠페인을 전개했고, 화학물질 관리가 실패하여 우리의 건강이 위협받는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그리고,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업의 로비가 가로막았다. 민주당 의원들 조차 기업의 눈치를 보며 제도개혁에 동참하지 않았다. 운동은 더욱 대중적으로 진행되었다. 정치가들에게는 ‘화학물질로부터 우리의 아이들을 지키는 법률을 거부한 정치인’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분위기는 또 바뀌었다. 그러자 화학물질 제조사들은 영악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화학물질 제도개혁을 기업도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이면서, 허수아비 국회의원들을 통해 가짜 개혁법안을 준비하였다. 이름만 개혁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도록 만들 셈이었다. 다시 운동은 대중을 만났다. ‘가짜 개혁’을 거부하자는 메시지가 전달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7월 25일 미국 상원의회 환경위원회에서 36년 만에 공식적인 첫 움직임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2015년까지 목표한 제도개혁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제대로 개혁법률이 통과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라고 자신하고 있다. 

나는 이들이 부러웠다. 하지만, 2005년에 미국의 노동조합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유럽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부러워하고 있기만 하면 지는 것이다. 부러우니 움직이자. 우리도 제대로 된 화학물질관리법을 통과시키자. 다음 총선과 다음 대선을 고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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