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08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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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사망 재판하던 판사가 위헌심판 제청
헌법재판소는 2010년 2월 25일 구 산업안전보건법 제69조 제1호 중 제10조 제1항 부분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하였다. 이 조항은 사업주가 산업안전보건법이 정한 사항을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하지 않을 경우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한 것이다.
[심판대상 조항]
구 산업안전보건법(1996. 12. 31. 법률 제5248호로 개정되고, 2009. 2. 6. 법률 제9434호로 개정되기 이전의 것)
제69조 (벌칙) 다음 각호의 1에 해당하는 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1. 제10조의 규정에 의한 보고를 하지 아니하거나 허위의 보고를 한 자
제10조 (보고의 의무) ① 사업주는 이 법 또는 이 법에 의한 명령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으로서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항을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이 사건은 원래 초고압 송전선이 지나는 전신주에서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던 근로자가 전류에 감전되어 사망한 사고를 사업주가 노동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이 발단이었다. 사업주는 산안법 조항에 따라 기소돼 재판을 받았는데, 담당판사가 위 조항에 위헌성이 있다고 보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심판을 요청하였다.
법률에 처벌 행위 · 범위 등 명확하게 제시하란 뜻
헌법재판소는 이 조항이 헌법상 죄형법정주의와 포괄위임입법금지원칙을 위반하여 위헌이라고 결정하였다.
죄형법정(罪形法定)주의란 범죄(罪)와 형(形)벌을 법(法)률로 정(定)한다는 뜻이다. 누구든지 법률조항만으로 그 법률이 처벌하는 행위가 무엇이며 그 형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도록 법률내용이 명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포괄위임입법금지원칙이란 법률이 처벌내용을 시행령(국회가 만든 법률을 집행하기 위해 정부대표인 대통령이 제정하는 하위법령)이나 시행규칙(법률과 시행령을 집행하기 위해 각부 장관이 제정하는 하위법령) 등 하위 법규로 정할 때는 포괄하여 위임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법률이 처벌내용을 하위법규에 위임하려면 부득이한 경우에 한정하되, 그럴때도 처벌대상 행위가 어떤 것인지 대강의 내용과 형벌 종류 및 상한과 폭을 법률에서 명백히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을 처벌하려면 국민의 대표인 국회에서 만든 법률조항이 있을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국회가 만든 법률을 집행하는 기관일 뿐 처벌여부나 처벌 범위 등의 기준을 스스로 정할 수 없다는 것이 헌법이 정한 삼권분립의 정신이다.
구 산안법 조항은 사업주가 “이 법 또는 이 법에 의한 명령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으로서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항”을 보고하지 아니하거나 허위의 보고를 한 경우 1천만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위 “명령”의 범위가 광범위하고 불명확하고, 또한 법에 따른 “명령”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의 구체 내용이 법률에서 전혀 정해지지 않아 그 내용이나 종류를 예측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결국 이 조항은 국민이 그 내용을 예측하여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기 어렵게 하므로 죄형법정주의에 위배된다고 하였다.
한편 이 조항은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범죄행위를 정하면서도 단지 “이 법 또는 이 법에 의한 명령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으로서 노동부령이 정하는 사항”을 “보고를 하지 아니하거나 허위의 보고를 한” 경우에 처벌한다고만 할 뿐, “이 법 또는 이 법의 시행을 위하여 필요한 사항”이 어떠한 것인지 법률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전혀 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처벌대상을 모두 하위법령인 노동부령에 포괄하여 백지위임 한 것은 헌법상 포괄위임금지원칙에 위배된다.
사업주의 중대재해 보고의무는 여전히 유효
그런데 위 산안법 조항은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이 나기 전에 모두 개정되었다.
산업안전보건법(2009. 2. 6. 법률 제9434호로 개정된 것)
제10조 (산업재해 발생 기록 및 보고 등) ①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재해발생원인 등을 기록ㆍ보존하여야 한다.
② 사업주는 제1항에 따라 기록한 산업재해 중 노동부령으로 정하는 산업재해에 대하여는 그 발생 개요ㆍ원인 및 보고 시기, 재발방지 계획 등을 노동부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다만,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41조에 따른 요양급여 또는 같은 법 제62조에 따른 유족급여를 신청한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
제72조 (과태료) ③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자에게는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1. 제10조제2항에 따른 보고를 하지 아니하거나 거짓으로 보고한 자
현행 산안법도 구 산안법처럼 사망이나 4일 이상 요양을 요하는 중대재해가 발생했을 때 사업주는 1월 이내에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부과한다. 다만 현행 조항은 중대 산업재해가 발생할 경우 사업주가 사고 개요ㆍ원인 및 보고 시기, 재발방지 계획 등 구체 보고내용을 법률에서 정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어길 경우 형벌이 아닌 과태료 부과라는 행정처분(과태료 부과는 형벌이 아니므로 죄형법정주의와 관계 없다)을 하게 해 죄형법정주의와 포괄위임금지원칙을 지키고 있다.
헌법재판소에서 구 산안법 조항을 위헌결정 한 것은 사업주가 중대재해를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하도록 한 것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보고하지 않은 사업주를 형사처벌하면서 그 내용을 법 자체에서 엄격하게 정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다. 현행 산안법은 이미 헌법에 맞게 개정되어 시행 중이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중대재해를 노동부장관에게 보고하지 않는 사업주는 법률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