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국, 또 후진국으로 이동하는 석면공장

by 일과건강 posted Mar 10,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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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노조 역무지부 산안부장 최학수, 일과건강 2008 3월호




2007년 지하철 노동자 석면역학조사 결과와 부산 제일화학의 석면피해 실태는 가히 우려스러울만한 결과였다. 그동안 말로만 무성했던 석면피해가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발병 잠복기가 긴 석면관련 질병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우리나라에서의 석면피해 문제는 이제 막 시작됐다고 보는 것이 전문가의 지배적인 의견이다. 때문에 앞으로 들이닥칠 석면피해 문제를 활동가로서 어떻게 대비하고 어떤 대책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런 문제의 해법을 찾고자 일본을 방문하게 됐다. 또한 일본에서 석면공장이 건너와 부산 제일화학에서 20년 동안 가동되다가 다시 저개발국가인 인도네시아로 이전된 사실의 규명도 풀어야 했다.


이런 목적을 갖고 방문단을 꾸렸다. 

방문단을 꾸리는 것은 지금까지 석면추방운동을 추진해온 단체와 전문가들이 맡았다. 방문단장은 백도명 교수(서울대 보건대학원)가 맡았고, 임상혁 소장(원진노동환경건강연구소), 강동묵 교수(부산대 의대), 이태경 의사(성심병원 산업의학과), 문은실 간호사(부산의대병원 산업의학과), 김지정 간호사(부산 백병원 산업의학과) 등 의학계와 최예용 부소장(시민환경연구소), 복진오(환경연합), 김인지(부산환경연합)씨 등 시민단체, 부산석면피해자 모임의 박영구 씨와 이동숙 씨, 노동단체 서울지하철노조 최학수(역무산안부장), 스즈키(노동건강연대) 씨 등이 참여했다. 부산MBC TV의 박상규, 김홍식 기자도 프로그램 제작 차 방문단 일정과 함께하며 취재했다. 

일본 방문지는 오사카 동쪽에 위치한 나라현(奈良縣)지역의 니치아스공장과 다츠다공장, 그리고 오사카 남쪽 센난시(泉南市)의 석면촌 지역, 구보타 석면공장이 있는 아마가사키 시(尼崎市), 또 다른 니치아스공장이 있는 요코하마 근처의 하시마 시(羽島市), 니치아스 본사와 일본석면추방단체(BANJAN)가 있는 도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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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gio Furuya




석면 유해성 일찌감치 안 일본 정부


첫날은 니치아스공장과 다츠다 공장이 있는 나라현을 방문해 공장과 피해주민들을 만나봤다.

니치아스는 일본에 석면공장을 6개나 운영하는 그룹회사였다. 그중 다츠다는 자회사에 속했다. 다츠다는 청석면제품 생산라인을 1970년까지만 가동하고 1970년부터는 부산으로 이전해서 1992년까지 22년 동안 운영했다. 다츠다가 홍보용으로 제작한 경력서류에는 부산으로 이전한 회사가 다츠다로 되어 있지만 현지에서 알아본 결과, 니치아스의 모든 석면공장의 청석면제품 라인이 다츠다와 똑같은 시기에 일제히 중지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츠다 뿐만 아니라 니치아스 각 공장에서 가동되었던 모든 청석면 라인이 부산으로 이전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부산에서 생산하면 많은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는 한국이 아직 석면에 대한 인식이 없기 때문에 청석면제품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생산할 수 있고 둘째는 인건비가 적게 드는 등 생산원가가 절약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둘째 날은 센난지역을 둘러봤다. 이곳은 석면촌이라 불릴 정도로 일본 석면산업의 중심지였다. 이곳은 1870년 일본에서는 최초로 석면산업이 시작된 발상지이다. 원래는 목화 면을 생산하는 곳이라서 방적업이 발달해 있었는데 석면산업이 들어오면서 석면방적업을 하는 공장들로 바뀌게 됐다. 석면산업이 전성기를 맞던 1960년대에 이곳의 석면공장은 가내 하청업이나 소규모 공장을 제외한 규모 있는 석면공장 업체만 65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 지역 사람들은 석면산업의 긴 역사 때문에 석면공장에서의 노동이 건강, 특히 폐에 해롭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한다. 그래서 석면공장이 다른 업종 보다 임금을 많이 지급하고 있었지만 가급적이면 석면공장에 다니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석면회사들은 작업환경개선을 통하여 노동자 보호하려는 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런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가난한 재일한국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땅한 일거리 없이 차별받던 한국인들은 대우가 좋은 석면공장을 다니면서 장차 풍요로운 삶을 위한 기반을 삼고자 했다. 물론 석면이 해롭다는 것은 들어보지도 못했고, 석면회사로부터 교육도 없었다 한다. 다만 먼지가 많이 발생해서 공장내부가 너무 지저분했는데 이렇게 치명적일 줄은 전혀 몰랐다고 한다. 둘째는 일본 정부가 1940년대 전쟁 때부터 군사용 무기에 사용되는 석면을 국책산업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정부도 석면 위해성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1938년에 센난지역에서 14개 석면공장 650명(남 319명, 여 331명)중 3년 이상 근무자 등 251명을 X-ray 조사했는데 석면폐 65명, 의심환자 15명이 나왔다는 보고가 있었다. 이처럼 석면 피해가 일찌감치 사실로 드러났는데도 일본정부는 제국주의의 시대적 상황 때문에 석면공장 노동자나 지역 주민들에게 석면의 위해성을 교육하거나 홍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석면공장도 비산방지 조치를 하도록 관리하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의 국책사업에 충성하는 기업만 생각할 뿐이어서 개인인 노동자는 오히려 희생대상이었다. 석면공장에서 충실하게 노동을 제공하는 게 제국주의를 위하는 분위기이었기 때문에 노동자 입장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런 까닭에 석면공장은 주위로부터 환경오염과 관련하여 아무런 간섭이나 제제를 받지 않은 채 오직 생산량 증가에만 몰두해 올 수 있었다. 이 지역이 다행인 것은 청석면을 사용하지 않고 백석면만 사용했다고 한다. 때문에 중피종환자 보다는 석면폐나 폐암환자가 많다고 했다.  


셋째 날은 석면피해로 유명한 구보타 석면공장 지역을 갔다. 구보타는 회사 자체자료를 통해 청석면 사용기간이 1957~1975년까지 20년 동안이라고 했다. 당시 구보타에 다녔던 한 노동자 증언에 따르면 회사가 석면을 취급하는 노동자들에게 위해성을 알리는 교육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다보니 노동자들은 작업 중에 석면분진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발생된 석면분진은 공장에서 걸러지지 않고 배출되는 바람에 공장주변 마을로 날아가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다. 구보타의 600여 회사원 중에 1/4 이 석면으로 사망했으며, 주변에 살았던 주민들 중 사망하거나 투병 중에 있는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그런데  구보타 피해는 종료된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라고 했다. 

실재로 일본의 석면피해 산업재해 승인 건수는 급격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었다. 석면에 의한 산업재해가 늘어난 이유를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일본 석면단체(BANJAN)의 활동을 들 수 있다.


일본의 석면단체는 2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 단체는 항만노조, 건설노조 등 노동단체와 석면 피해자가족, 자원활동가, 의사, 법률가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각 지방조직까지 둔 체계인 연합단체였다. 이 단체에서는 석면피해지역 자료와 피해자 발굴사업 등을 10여 년 전부터 해오면서 의사와 법률가로부터 자문을 받아 산재처리에 합당한 근거를 축적하고 이 자료를 통해 노동자와 피해가족의 산재처리를 도아 왔는데 대표적인 게 구보타 사건 발굴이었다. 다른 하나는 청석면의 사용시기이다. 일본에서는 1950년대부터 1970년까지 20여 년 동안 청석면을 사용했다. 이때 사용된 청석면이 잠복기를 지나 이제 환자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노동자, 일반인 가리지 않은 재일한국인 피해


우리나라에서는 일제 때 석면광산이 있었지만 생산공장이 있었던 건 아니다. 1960년대 후반 새마을운동 때 슬레이트 지붕재를 정부가 권장하면서부터 석면이 대량으로 사용되는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일본은 석면을 사용한 지가 130년이나 됐다. 우리가 석면을 전혀 모르고 있을 때 일본은 이미 석면의 위해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제 때 군사용 무기에 석면을 사용하면서 석면공장이 활황을 맞았는데 한국인 노동자를 많이 데려다 썼다한다. 또 홋카이도 석면광산에는 강제노역에 한국인을 동원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처럼 한국인들이 석면공장에 많이 다닌 이유는 이미 일본인들은 석면공장을 흔히 말하는 3D산업(dirty, dangerous, difficult)처럼 여기고 취업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석면공장은 노동력 확보를 위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집중되었다. 이번에 방문한 나라 현과 센난 시와 한난 시 지역, 그리고 아마가사키 시 역시 지리적으로 오사카와 인접한 도시였고 증언을 통해서 한국인이 석면공장에 많이 다녔다는 확인을 가는 곳마다에서 할 수 있었다. 센난 지역에 갔을 땐 재일한국인 피해자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가족들을 잃었거나 본인들이 석면피해를 입은 사람들이었다. 하나같이 석면이 해로운 것인 줄 알았더라면 일하지 않았을 거라고 절규하면서 위해성을 알면서도 조치를 하지 않은 석면회사와 일본정부가 밉다고 했다. 재일한국인의 피해는 노동자 말고도 일반인한테서도 있었다. 아직 정확한 피해조사가 이뤄지지 않아서 피해정도가 몇 명이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석면공장에 다녔던 한국인 노동자가 가정을 이루면서 석면공장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거주하기도 했고, 출퇴근의 용이성 때문에 석면공장 주변에서 살기도 했으며, 부부가 석면공장을 같이 다니는 관계로 애들을 석면공장에서 돌봐주기도 했다는 증언과 피해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이윤 쫓아 좀 더 못 사는 나라로


일본 니치아스는 1970년에 6개 석면공장의 청석면 라인을 모두 중지하고 부산으로 이전했다. 부산으로 이전된 석면공장은 1992년 인도네시아로 이전해서 현재까지 가동되고 있다. 석면공장이 니치아스처럼 국가 간 이동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우선 석면산업은 공해산업이라서 공장이 있었던 곳에는 피해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데 석면관련 질병의 특성이 20~30여년의 잠복기를 거친 후 나타나기 때문에 보통 20년 정도 가동하다가 석면피해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에 다른 국가로 이전하는 수법을 쓴다. 그리고 국가간 이동은 반드시 석면의 위험성을 잘 모르는 후진국으로 옮겨가는 것이 특징이다. 니치아스도 일본에서 한국의 부산, 인도네시아로 이전 과정을 거쳤다. 인도네시아에서도 20년을 채우면 또 다른 후진국을 찾아 이전할 확률이 높다. 석면공해산업이 이런 형태로 국가 간 이동하는 것은 약자에 대한 비열한 횡포이자 무지한 사람들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이처럼 이동해서 다시 번성하게 해서는 안 된다. 이번에 일본을 방문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니치아스의 석면공장 한국 이전에 대한 항의였다. 그리고 부산에서 인도네시아로 이전한 우리나라 문제도 함께 되짚어 봤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활동가 틀


일본의 석면추방전국연락회의(BANJAN)의 활동은 본받을 게 많았다. 필자는 이번 일본방문을 다 마치고 귀국할 때까지 그들의 활동을 대수롭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일본이란 나라가 보수적인 우파성향 나라인데다가 매년 지하철노조와 교류하고 있는 JR노조의 느슨한 행동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일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반잔(BANJAN)과의 하루하루 있었던 일을 되새겨 보고, 가져온 자료를 차분하게 정리하면서 그들의 치밀하고 끈질긴 행동과 전략, 그리고 사회를 바라보는 양심적이면서 균형 잡힌 시각, 활동가들의 열정 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높이 평가하고 싶은 건 활동가의 희생과 봉사가 담긴 열정이었다. 구보타사건도 한 활동가의 꾸준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활동가들은 20여년을 역사해 오면서 학자와 법률가, 언론, 피해자, 활동가들이 충돌 없이 잘 융합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때문에 석면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대응 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활동가 틀을 만드는 문제다. 활동가 그룹이 튼튼해야 피해자를 발굴할 수 있고, 필요한 전문가를 얻을 수 있고, 문제를 전파할 수 있는 언론을 끌어들일 수 있다. 이번 일본방문이 우리나라에서 석면추방운동이 한층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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