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건강 2006년 6월호원진교육센터 이현정(nolza21c@paran.com)
▲작년에 이어 진폐환자 야유회를 주최한 천주교 노동사목회 산재사목 소속 수녀님과 신부님, 자원봉사자들이 인사하고 있다.
전날, 늦은 밤 시각 눈에 들어 온 일기예보는 나를 긴장하게 했다. 강풍, 꽤 많은 비, 기온도 내려갈 듯… 일기예보자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모처럼 야외로 떠나는 어르신들의 즐거움을 반감시키지는 않을까 싶었다. 다음날 아침, 흐린 하늘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다행이다’하며 나선 길에 바람은 좀 심했다.
5월 22일, 관광버스 두 대에 희끗희끗 흰 머리칼이 검은 머리칼 수를 앞지른 분들이 자리를 잡고 오늘의 목적지인 광릉수목원으로 향했다. 천주교 노동사목회 산재사목이 작년에 이어 주최한 ‘진페환자 야유회’가 흐린 하늘을 무관심하게 내버려 두고 추억 속으로 또한 현실 속으로 들어갔다. 거동이 불편하신 분, 호흡이 쉽지 않은 분, 버스 안에서 노래 두 곡을 시원하게 선사하신 분…. 과거 몇 십 년 전 동원탄광에서, 태백탄광 등지에서 같은 일을 하던 광부들이 서로 다른 신체 조건을 가진 채 한 자리에 모였다.
점심을 위해 식당에 도착하자 조금씩 흩뿌리던 비는 여름 장마비처럼 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비 때문에 수목원에 들어가진 못 했지만 한 낮의 비와 보신탕, 삼계탕, 마치 맞은 반주는 오히려 ‘비오고 바람 부는 날의 야유회’ 기분을 내는데 적절했다. 식사를 마친 후 식당에서 자리를 내준 2층에서 준비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우선, 산재보험 제도개혁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노총 산업환경연구소 임성호 부장이 간단하게 현재 상황을 얘기한 후 참석자들이 의견을 개진했다. 참석자들은 기존에 지급되고 있는 요양급여가 제한적으로 지급되거나 현재 수준보다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진폐증이 있지만 단지 합병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치료나 요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개선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실제 재가진폐환자들은 ‘제대로 치료받다 죽어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것이다. 2004년 만들어진 한국재가진폐재해자협회 주응환 회장은 “요양자들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은 한계가 있다”며 재가진폐자들과 함께 산재보험이 ‘몸이 아픈 사람이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이어진 행사는 ‘광부시절 용어 맞추기’였다. 그 시절 사용하던 말들은 대개가 일본어인데 일본어와 그 뜻을 우리말로 적는 게임이었다. 일하던 시절은 고되고 힘들었어도 그것이 ‘추억’으로 기억되면 훗날에는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것일까? 산재보험 제도개혁을 얘기할 때까지 조용하던 분들도 함박웃음을 지으며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했다. 조용하던 공간은 웃음소리, ‘아니야, 아니야’ ‘그거 아냐?’ ‘이건 거 같은데…’ 등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려는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사끼야마(숙련 광원), 야도무끼(보조 광원), 하리(관목), 주나(끈), 삐스(뇌관), 후마이(바닥공), 단도리(준비작업), 방우찌(반타작업), 방와리(작업배치), 메꾸라고도(막힌 갱도), 시구리(보수), 가베시메(벽손질)…
기억도 희미해졌을 과거 단어들이 나눠준 종이를 빼곡하게 채워갔다. 하지만 세월을 완전히 거스를 수는 없었나보다. 28개 단어를 적은 팀이 1등을 차지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어르신들 머리 속에는 아마 젊은 시절 갱도 안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자신들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야유회가 정리될 시간이 되면서 한 번 더 ‘바라는 점’들과 궁금한 점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입원환자와 통원치료환자 대우를 동등하게 한다는 것을 명문화해야 한다.”
“의증환자도 건강수첩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다니던 회사가 없어지면 경력증명서 발급과 인원보증이 힘들어 산재신청을 하기 힘들다.”
“환자로서 대우를 해 달라. 개인이 준비해야 되는 일이 너무 많다. 정밀검사를 받으려면 일주일 정도 걸리는데, 이 때 교육이나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면 좋겠다.”
“도심이 아닌 녹지대에 진폐전문 요양원을 설립하는 건 어떤가? 통원치료가 힘든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순회치료도 고려해 볼만하다.”
어르신 중 한 분은 산업재해를 막으려면 하도급을 금지해야 한다는 말씀도 있었다. 아마, 하청에 하청으로 노동자들이 제 몫을 못 가져가고 안전이나 건강을 지키는데 씀씀이가 박한 것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나보다. 제도의 불합리를 어르신들은 몸으로 삶으로 이미 다 터득하고 계신 것이다.
연탄이 한 겨울 ‘보온’을 위한 최고의 재료였던 시절,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광부들 역시 대한민국 ‘산업역군’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석탄산업이 사양화되고 석유와 천연가스가 보온을 책임지는 대체 재료로 등장하면서 광부들은 진폐증이란 병력을 챙긴 채 하나 둘씩 탄광을 떠나야했다. 목숨을 담보로 몇 천 미터 아래로 들어가 갱을 파면서 산업역군으로 삶의 대부분을 바친 이 분들에게 남은 것은 진페증이 준 합병증이거나 진폐증 인정도 못 받아 하루하루 약값을 대기에도 버거운 생활고 이다.
산재보험이나 산업안전으로 집회가 개최되면 산재환자들이 외치는 구호 중 하나가 ‘일할 때는 산업역군, 다치고 나면 산업쓰레기’이다. 그만큼 산업재해자들은 이 사회에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어두운 갱도에서 젊음을 바친 오늘 이 어르신들도 마찬가지 아닐까?

▲검은 머리칼보다 흰 머리칼이 더 많아진 광부들. 더 이상 산업역군이 아니어도 국가는 그들을 책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