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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환경건강연구소 산업위생실장 김 신 범 ⓒ 시사IN 조남진 기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대한 소개부터


 1999년 6월 5일에 문을 열었고 참고로 나는 5월 29일에 결혼했다(신혼여행은? 후다닥, 당겨서 다녀왔단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원진레이온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원진레이온 투쟁은 크게 3단계로 나뉘는데, 첫 번째가 88년의 직업병 인정투쟁, 두 번째 단계가 공장 폐쇄조치에 대한 반대투쟁 그리고 마지막이 폐쇄 이후 산재전문병원 건립을 위한 투쟁이다. 원진레이온 주채권은행이 산업은행이었는데 공장부지(구리에 있는 현 부영아파트단지)를 팔아서 어마어마한 돈을 남겼고 그 중 110억을 받아 녹색병원 건립기금으로 썼다. 당시 환자들이 연세가 많으셔서 돌아가시는 분들도 있었고 자살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세상 뜨기 전에 이 병원에 한 번 누워보는 게 소원’이라는 분들이 계셨고, 구리에 서둘러 병원을 세웠다. 그러다 2003년에 서울에 녹색병원을 세웠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1999년부터 구리에 있다가 2003년에 병원이 세워지며 서울로 옮겨왔다. 99년에 세워질 당시에는 5명의 창립멤버가 있었고 지금은 상근자 18명, 인턴연구원 2명으로 총 20명이 연구소에 함께 하고 있다.

 

발암물질 사업은 어떻게


2004년 즈음이 발암물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때인데 결론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자본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고 의심하지 못했던 걸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2008년 정도에 발암물질 추방사업을 해보기로 하고 2009년에 발암물질감시네트워크와 발암물질정보센터를열었다. 이 활동들을 통해 정부에서 법제도를 개선하는 성과도 있었다. 
금속노조와 발암물질진단사업도 했는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발암물질 목록이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조사해본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금속 노동자들이 사용하는 물질 9천여개 정도를 조사했는데 그것들에 발암물질이 30-40%가까이 들어있었고 고위험우려물질은 50%정도가 들어있었다.


결과가 이렇다면 당연히 발암물질을 줄여야 한다. 제도 개선을 한다고 치며 조금 손보아 될 일이 아니었다. 산안법부터 환경부까지 다 걸려있다. 다시 말해 정부가 지금까지의 실패를 인정하고 완전히 새로운 틀을 짜야하는 거다. 유럽의 REACH만 봐도 10년에 걸쳐 그 제도를 만들었고 2007년이 되어서야 실행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이 가능하려면 발암물질 문제가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어야 가능하다. 예를 들어 베이비파우더에 석면이 들어있던 사건을 떠올려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전국민적 분노가 있었지만 소비자가 아닌 생산을 담당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걱정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가십거리가 되는 수준이지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거다.


어떻게 하면 이런 발암물질의 문제를 전체 사회의 문제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다 ‘생활 속의 운동을 통해 제도를 바꾸는’ 새로운 틀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협을 만났다. 안전한 먹거리 유통을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이 문제에 가장 민감하고 정직하게 응할 것이라 생각했고 함께 하기로 했다. 그리고 참교육학부모회를 만났다. 소비자 그리고 생활 영역까지 포괄하는 틀을 짠 것이고 한국진보연대, 문화연대, 민주노총과 각 산별노조 등과 함께 6월 발족 예정에 있다.

금속노조와 함께 한 발암물질사업은 기대가 컸는데, 발암물질을 직접 사용하는 당사자인 조합원들에게서 발암물질을 추방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지 않았다 
근골격계투쟁과 비슷한 상황이지 않을까. 일하는 이들도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은 다 알지만 감당하기 어렵다는, 수습하기 어렵다는 두려움이 있다. 일을 쳐야하는데... 비슷한 말이지만 또 다른 이유는 ‘대안이 있어야한다’는 강박이다. 잘못된 생각이다. 왜 노조가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이 있어야 하는가. 대안은 사측에서 고민할 일이다. 노조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에 대해 사측이 조사하고 대안을 마련하면, 그 조사가 제대로 되었는지 노조에서 감시하고 대안이 없다면 사용을 줄이고 사용해도 피해가 최소한이 되도록 고민할 일이다.


지금은 모범사업장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발암물질 문제에 대한 대응은 가능하다는 것, 회사에 대안 마련의 책임을 주어야한다는 것, 나서는 것이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모범사업장들이 생겨나고 있고 타타대우상용차의 경우만 보더라고 훌륭히 잘해내고 있지 않나. 두려움을 극복해나가는 과정 중에 있다.

 

활발히 활동 중인 고엽제 이야기를 나눌텐데, ‘노동환경건강연구소’라는 이름에 대한 설명을 해주시면 자연스럽게 고엽제 얘기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 

노동환경건강연구소는 ‘노동과 환경이 건강하도록’이다. 노동 그리고 환경의 건강을 위한 연구소이다. 적극적으로 환경문제도 다루고자 했는데 지금까지는 노동에 좀 더 치중해 있었던 것이고 현재는 자연스럽게 환경으로 활동이 확장되어가는 중이다. 
미군의 고엽제 불법매립은 큰 이슈가 되었다. ‘고엽제’라는 물질에 대해 베트남전에 참여했었던 한국인들 사이에 ‘고엽제=치명적’이라는 학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도 지금 긴장하고 있는 상태인데 주둔지의 국민도 아닌 자국민의 진술로 알려진 고엽제 불법매립이잖나. 이번에 진술한 하우스씨는 미국내의 고엽제 피해자며 지금도 계속 문제제기 중인 사람이다. 미군은 이 사건을 자꾸 미궁으로 몰아가려 하고 한국정부는 SOFA에 묶어서 어정쩡하게 굴고 있다.

 

조사를 미궁으로 몰아간다?


 조사를 애매하게 하는 것이다. 조사해봤더니 결과는 큰 문제 아니라는, 발표도 시간을 끌어서 현재의 흥분이 가라앉은 후 여름 휴가철이나 보도하는 식으로 말이다. 실제로 조사가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레이더 한 대 가지고 캠프 캐럴을 훑으며 매립흔적을 찾겠다고 돌아다니고 있는데 그렇게 할 일이 아니다. 캠프 캐럴이 서울시만한 것도 아니고 동네에 있는 기지이고 문서에도 매립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으니 그 부분의 땅을 파서 토양을 분석하면 된다. 미군에서는 조사한다고 지하수도 엄청 퍼내고 있는데 고엽제에 극미량 포함되어 있는 다이옥신은 물에 안 녹는다. 지하수를 조사해봤자 검출가능성이 몹시 낮은데도 미군에서는 조사를 한다며 지하수를 퍼내는 이런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조사가 어정쩡하게 끝나버리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왜관지역 주민들이다.

 이 문제가 터지자마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에서 대책위에 결합했다. 다이옥신에 대한 공부를 해오고 있었는데 이 전문지식, 기술 자료가 대책기구나 국민들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재 대책위는 ‘불법매립’에 대해 확인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로 두고 있다. 불법매립을 확인한 후 타 기지까지 포함한 전체를 조사해야한다.

 

불법매립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미군이 고엽제를 묻었다던 시기가 ‘1978년’이다. 그 당시는 고엽제에 의한 다이옥신 오염의 문제가 잘 알려지고 어떻게 폐기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때이다. 1976년 이태리 세베소(Seveso)라는 곳에서 폭발사고로 다이옥신 오염이 발생했고 오염된 토양을 지하벙커에 묻었다. 80년대 미국 뉴저지주에서 다이옥신 오염사고가 일어나서 이동식 소각로에서 오염된 토양을 처리했다(오염된 토양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고온소각 방식이 가장 좋다). 미군이 고엽제를 불법매립하던 그 시기는 다이옥신 오염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진행되던 때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리했다는 건 심각한 환경범죄다. ‘불법매립’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미군의 책임을 묻기 위한 과정이다.

 

불법 매립을 확인하고 나면 그 다음은


복원이다. 캠프 캐럴보다 더 심각한 곳(기지)이 많을 것이라고 본다. 예를 들어 춘천에 있는 미군기지에서는 헬기에 고엽제를 싣고 가서 DMZ에 뿌리고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과정은, 고엽제를 저장하고 운반하고 사용하는, 고엽제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전형적인 경로들이다. 불법매립을 확인한 후 오염정도를 확인하고 어떻게 복원할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그 다음 과제가 건강영향이다. 건강상의 피해는 매우 복합적이다. 기름에 다이옥신에... 정확한 조사가 없으면 그 규모를 예측할수조차 없다. 
지금은 미군기지가 있는 지역별로 대책기구가 만들어지는 단계에 와있는데 불법 매립이 세상에 알려지고, 독자적인 조사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만들어지면 미군도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 본다. 현재 대책위에는 국민공감대 형성을 위한 활동을 기획하는 조직팀과 환경단체 중심으로 언론대응팀이 꾸려져있다. 녹색연대, 참여연대, 노동환경건강연구소로 꾸려진 진상조사팀은 조사의 문제점과 앞으로의 조사 방향을 세우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피해(피해자) 제보도 받고 있다.

 

이제 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보자. 어떻게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대학 때 수의학을 전공했다. 특별히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점수에 맞춰서, 아버지의 권유도 있었고 해서 수의학을 택했다. 대학교 들어가자마자 동물은 행동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테니 ‘동물행동학’을 공부해야겠다 생각하고 대학원에서 수업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그 바탕에는 ‘대학가면 절대 데모 안 해야지’라는 생각이 깔려있었다. 
아버님이 목사님이셨는데 생활이 몹시 어려웠다. 그래서 어머니는 청소부터 온갖 일을 다 하시면 살림을 꾸려나가셨다. 그런 어머니에 대한 짠함, 어머니를 잘 모셔야겠다는 다짐... 그래서 대학가면 절대 데모는 안 해야지라고 생각했던 거다. 이렇게 생각은 했지만...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은 온갖 모순을 다 겪었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인천에 있는 판잣집이 늘어선 동네에 살았는데 수업료를 못 냈다고 맞기도 했다. 수업료를 못 낸다고 맞아야 하나. 동네 친구의 아버지가 화물 하역일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당연히 산재보상을 받지 못했고 회사에서는 중학생이었던 그 친구를 돌아가신 친구의 아버지 대신 그 회사에 취직시켜주는 것으로 합의를 했다. 그 당시엔 비일비재한 일이었다.


데모는 절대 안 하겠다 했지만 나름 최소한의 도리라 생각하면서 1학년 여름에 농활을 가고 총학생회 선거를 돕고 하면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때 많이 울었다. 어머니에게 너무 미안해서... 학생운동을 하며 당연히 현장에 가야겠다 생각했다. 당시 인천에서 일하고 있던 선배들과 세미나하며 취업할 준비를 했다. 그게 92년 즈음이었을 텐데 준비하는 와중에 선배들이 현장을 정리하고 나오게 된다. 그 때부터 1년을 방황했다. 술과 친구하며 ‘뭘 해야하나’, ‘다른 현장에 가야하나’ 고민하며 1년을 보냈다. 이때의 좌절은 몹시 컸다. 
그런데 잘 됐다 싶은 마음도 있더라. 내가 원했던 길이 맞는지를 다시 되돌아보기도 했고. 그 일 년은 나에게 돌아봄이었고 고마운 사람들의 조언을 듣게 된 때이기도 하다. 아내를 만나기도 했고.

 

1년의 방황, 그 뒤의 선택은 무엇이었나


 보건대학원에 다니는 선배로부터 ‘산재라는 게 있다, 이걸 살려서 니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에 기여하면 어떻겠니’ 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길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 갔는데 그게 원진레이온 토론회였다. 당시에 난 여전히 ‘내가 산재문제에 쓸모가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그 토론회에서 처음 만난 산재노동자협의회 식구들에게 ‘당신과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고 큰 용기를 얻었다. 중학교 2학년 영어책 갖다놓고 아내에게 배우며 공부했다. 대학교 졸업도 대학원 입학도 당시 나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다. 보건대학원에 다니며 방송통신대 조교도 했는데, 방송통신대에 다녔던 친구들의 소원이 실험을 직접 해보고 졸업 논문을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교수에게 허락받고 같이 실험하고 공부를 도왔다. 그러다 한국노총에 안전보건연구소가 생겼다. 그 자리에 가고 싶었지만 그 친구들을 도와주다 말고 그만두게 되는 것이 싫어서 지원하지 못했는데 거짓말처럼 얼마 후에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생겼고 지금까지 연구소와 함께 하고 있다.

 

앞으로는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


 90년 1월에 전노협 출범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 조직과 함께하며 내가 기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다. 그 뒤로 민주노총이 생겼는데 대학원에 다니면서 밤이면 가끔씩 만두 사들고 가서 애쓰신다고, 저도 앞으로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건네기도 했다. 민주노총과 일을 하는 것은 이 공부를 하고 있는 내가 세울 수 있던 큰 목표였고 민주노총 노안위원을 맡았던 것은 내게 정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요즘은... 나에 대해 돌아보고 있다. ‘뭘 할까’, ‘무슨 꿈을 꾸면 좋을까’ 하고. 민주노총과 사업하며 기여하고 싶다는 꿈은 이뤘으니... 꿈을 너무 작게 가졌었나보다, 하하. 일터 독자들이 조언을 해주셔도 참 좋겠다. 그런 조언들로 꾸려온 것이 내 삶이었다.

 

다들 자기 사무실로 와서 같이 일하자고 하는거 아닌가


 하하, 그것도 좋다. 나는 영세사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해야하고 싶다. 그래서 2002년 즈음에 일반노조도 가입했다. 새로운 꿈을 꾼다면... 이름을 남기려는 욕심을 부려도 될까.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위해 무지 애쓴이로. 영세 사업장 노동자 건강권의 아버지는 어떨까? 하하.

▶ 인터뷰, 정리 _ 선전위원 흑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