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라 1988 
: 한국직업병 투쟁의 역사와 노동안전보건운동의 과제

글 : 30주기 추모위 이진우 집행위원(민주노총 노안부장)

87년 6월 항쟁 이후 대통령직선제 등 민주화를 일부 쟁취한 1988년의 여름. 한국은 고도성장을 구가하고 있었으며,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전국이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열악하다는 표현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참혹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그 해 7월 2일 수은중독으로 청소년 노동자 문송면(15세)이 사망했다. 레이온 섬유 공장에서 집단직업병도 발병했다. 숨길 수 없는 한국 노동안전보건의 민낯이었다.
 
1987년 말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문송면은 학교에서 공장 구인홍보를 듣게 되었다. “잠은 기숙사에서 재워주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다”는 말에 홀려 그는 졸업식도 하기 전에 현장실습을 명목으로 공장에 들어갔다. 그곳은 서울 양평동에 소재한 온도계·압력계 제조업체인 협성계공(현 협성히스코)이었다. 문송면은 압력계 도장실에서 페인트칠을 하거나 ‘신나’를 사용해 닦는 보조역할을 하다가 온도계 부서로 넘어가 온도계에 수은을 주입했다. 그리고 다음해 1월 중순부터 두통과 전신통증, 불면증에 시달리며 몸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입사한지 두 달 만에 일어난 일이다.

결국 2월 초 문송면은 휴직계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와 병원을 전전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원인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3월이 지나서야 서울대병원에서 직업병을 의심하는 의사를 만났고, 가톨릭의대 산업의학연구소에 의뢰한 결과 수은중독과 유기용제중독으로 진단받았다. 노동부는 서울대병원이 산재보험 미지정기관이라는 이유와 회사의 확인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산재요양신청을 반려했다. 1988년 5월 11일자 <동아일보>에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던 15세 소년이 두 달 만에 수은에 중독’됐다는 기사가 실렸다. 언론에 떠밀려 시행된 노동부의 역학조사 결과는 수은중독이었다. 6월에 겨우 산재 승인을 받고 여의도 성모병원으로 옮겼지만, 불과 이틀 만에 전신마비와 장마비로 인한 심한 구토로 이물질이 폐로 넘어가며 기도를 막아 사망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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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문송면

노동운동가와 진보적 보건의료인들은 ‘고(故) 문송면 산업재해노동자 장례위원회’를 결성해 16일간의 장례투쟁을 진행한다. 장례투쟁은 산재직업병 문제의 심각성을 세상에 알렸고 본격적인 직업병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우리도 직업병 피해자”라며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는 투쟁에 나서게 된다.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원진레이온은 펄프에 이황화탄소, 황화수소, 황산 등을 써서 인견사(레이온)를 만드는 곳으로 종사자 1500여 명 규모의 중견기업이었다. 유기용제인 이황화탄소에 노출되는 작업 공정에 500여 명이 투입되었는데, 이 물질은 호흡기나 피부 접촉을 통해 인체에 유입돼 정신이상과 뇌경색, 다발성 신경염, 협심증, 신부전증, 중풍 증상까지 일으킨다. 하지만 직업병을 예방할 수 있는 환기시설, 보호구는 없다시피 했다. 그 결과 원진레이온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직업병으로 인정된 수만 943명이고, 사망한 노동자는 229명에 달했다. 원진레이온은 국내 최대의 직업병 사건이자, 세계 최대의 이황화탄소중독 사건이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김봉환의 사망으로 137일간 투쟁을 벌여 이황화탄소 중독에 대한 업무상 재해 인정기준을 비로소 만들었다. 또한 공장폐업과정에서 치료와 보상, 그리고 자활사업을 위해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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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진레이온에서 발생한 비극은 한국에서만 발생한 것은 아니다. 원진레이온은 1961년 한일경제협정 직후 일본에서 사용한 방사기계를, 이황화탄소 중독증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한국에 중고로 들여왔다. 1993년 원진레이온 사태로 회사가 폐업 한 후 이 기계는 1994년 중국 화학섬유공사에 50억원에 매각됐다. ‘이황화탄소 중독’에 의한 직업병이 발생해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면, 공장 폐업 후 설비는 다른 국가에 팔아버리는 행태가 반복되며 이미 알려진 직업병이 되풀이되었다. 

88년 문송면 수은중독 사망대책투쟁, 88년~91년 원진레이온 직업병 인정 투쟁은 87년 이후 폭발한 민주노조 성장 속에 시작된 진정한 의미의 노동안전보건운동이었다. 이후 노동안전보건 부분은 현장 변화와 제도 개선 등 발전을 거듭해왔지만, 아직도 여러 문제들은 현재진행형이다. 

현장실습 명목으로 엘지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콜수’를 채워야 했던 여고생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주도의 한 고교 실습생은 프레스에 끼여 사망했다. 외주 업체 소속으로 철도 스크린도어를 혼자서 수리하고 밥 먹을 시간도 없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수리설치기사 ‘김군’은 문과 열차 사이에 끼여 사망했다. 문송면과 같은 청소년·청년 노동자들의 죽음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보고된 적이 없다는 메탄올 중독사고가 2016년에 알려졌고, 사용하는 물질도 모른 채 파견노동자로 일하던 청년들은 실명했다. 심지어 산재는 노동부 감독을 받은 사업장에서도 발생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수은중독이 2015년 광주 남영전구 공장 철거 과정에서 발생했다. 삼성 직업병 산재사망 노동자는 11년간 118명에 달하고, 해결을 요구하는 반올림의 농성투쟁은 900여 일이 지나고 있다. 삼성반도체에서 발생한 직업병 문제는 미국, 영국, 대만 알씨에이, 중국 폭스콘 공장 등에서도 차례로 나타났다. 일본에서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수출된 원진레이온 기계처럼 기업들은 이윤을 쫓아 규제가 약한 곳을 찾아 국경을 넘나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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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에서 사망한 '김군'을 추모하는 시민들의 메시지 (출처 뉴시스)


정권이 바뀌고 여러 산업안전 대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청소년 노동자의 건강권, 취급하는 물질에 대한 노동자의 알권리, 치료받을 권리 등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할 권리는 여전히 답보상태다. 현장은 그대로이고, 사고발생 시기에만 반짝 집중된 관심은 실종되기 일쑤다. 

올 해는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다. 이에 노동안전보건 문제를 다시 사회적 의제로 전면화하고자 한다. 안전보건을 고민하는 여러 단체들과 범사회적인 추모조직위원회를 구성하여 30주기 추모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산재사망자에 대한 추모를 넘어, 노동자와 시민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고자 한다. 5월 16일 추모위 발족을 시작으로, 지자체 선거를 앞둔 5월 말에는 노동자·시민 모두에게 안전한 사회를 위한 안전보건선언을 계획 중이다. 6월에는 각지에서 산재 사진전을 진행하고, 정부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참여를 조직하여 추모식과 추모제를 준비 중이다. 7월에는 연극과 영화상영을 하며 건강권 버스로 전국을 순회하고, 노동안전보건운동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과제에 대한 대토론회를 열 것이다. 문송면·원진노동자 산재사망 30주기 사업에 많은 연대와 관심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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